수민동
수민동이란 이름은 1957년 1월 1일에 수안동과 낙민동 2개의 법정동을 합하면서 생긴 행정동 이름입니다.
수민동은 옛 동래도호부(이 다음부터는 '동래부'라고 줄여서 씀) 읍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평남, 안민, 장남, 안국, 서호동을 합해 수안동이 되고, 신락과 회룡동을 합하여 낙민동이라 해서 동래군 동래면에 편입되었으며, 옛날부터 동래부사가 집무하던 동헌(부산지방유형문화재 제1호)이 위치하고 있어 사실상 동래의 모든 중심이 되어 왔습니다."
수안동(壽安洞)이라고 불린 것은 당시 동래부의 최고 책임자인 동래부사가 집무하던 동헌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어 가장 으뜸되는 관아 안이라는 뜻의 수안(首安), 또는 땅을 조금만 파도 물이 나오는 등 물이 흔하다고 수안(水安), 혹은 동래성 안의 물이 밖으로 흘러내리는 수문 안의 동네라는 뜻으로 수안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낙민동(樂民洞)은 조선시대 남문 동변동이라 부르던 지역인데, 수령이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려 나가는 지역이라 하여 백성을 즐겁게 해주었다는 뜻으로, 일제강점기 때 낙민동으로 고쳐 졌습니다. 이 지역은 1960년대만 하더라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물구덩이로 미나리꽝이거나 연밭이었습니다.
복산동
복산동은 일제시대의 복천동(福泉洞)과 칠산동(漆山洞)이 해방후 조례에 의하여 병합되면서 복산동이라 개칭하게 되었습니다.
복천동이란 이름은 동래부지 성곽조에 동래읍성안에는 우물이 6개나 된다 하였고 '복이 넘쳐 흐르는 샘'들이 많았다하여 복천동이란 이름이 붙여져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가야시대 문화를 알 수 있는 복천동 고분군이 있습니다.
칠산동은 옛날 동래의 거칠산국과 관련, 동래읍성 뒷산을 칠산이라 부른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명륜동
동래구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명륜동은 동래군 읍내면 지역으로 동래향교가 위치하고 있어 '향교골', '교리' 혹은 '객달리', '신향교동'이라 불렀는데 1914년 대평동, 범어동, 서호동 일부를 합해 교동이라 했습니다.
명륜동은 향교의 중심건물인 명륜당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것입니다.
명륜1동
조선시대의 공립지방교육기관이 있던 동래향교를 비롯한 옛 동래읍성의 문화유적지를 끼고 있는 곳인 만큼 예의바르고 보수적인 성격을 지닌 마을이며, 동래구 행정의 중심지입니다. 옛 선조들의 교육진흥정책의 일환으로 세워진 동래향교는 조선초기부터 세워졌으나, 몇 차례 옮겨졌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1605년(선조38)에 중건된 후에도 다시 위치를 옮겼다가 지금의 자리에 세워진 것은 1813년(순조 13)에 동래부사 홍수만에 의한 것입니다.
명륜2동
1960년대에는 미나리꽝이었던 이 지역은 명륜1동과는 달리 문화유적지는 없지만 동래의 진산(서울이나 성이 있는 중심지의 뒤쪽에 위치한 큰 산)인 윤산(輪山)의 정기를 그대로 이어 받아 주산인 마안산을 업고 있는 쾌적한 주거지역이며, 지하철역, 산업도로 등과 이웃한 교통중심지이기도 합니다.
온천동
동래구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온천동은 부산의 진산이자 명산인 금정산의 산릉으로 이어져 있는 지역으로서 1899년까지 금산리, 혹은 금정리라 부르던 곳이다. 동래군 서상면 지역인데 1914년 산저리, 미남동, 화촌동과 북면의 소정동을 합해 온천동이 되었습니다.
온천1동은 풍부한 온천수와 기암괴석의 울창한 소나무숲으로 형성된 금강공원을 가진 국내유수의 관광지이며 이에 따른 숙박, 음식점 등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온천2동과 3동은 신개발지역으로 대형아파트 단지가 많으며 신흥주택지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온천1동
각종 기암괴석과 40~100년생의 울창한 나무들로 제2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금정산 기슭에 위치한 온천1동은 1899년까지 금산리, 혹은 금정리라 부르던 것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후 온천장에다 산저리와 장전리의 일부를 합하여 온천리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온천동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설은 없으나, 신라 때부터 온천이 발견되어 왕이 자주 다녀갔다고 하며, 『동래부지』 산천부분에는 '동래부에 있는 온천은 그 열이 계란을 익힐만하고 환자가 목욕을 하면 금방 나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온정을 관리하는 온정원을 세우고 역의 말까지 둔 적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래로 동래 온천의 효험과 유래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천혜의 자원이자 관광명소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금정산의 자연경관과 온천시설의 집중으로 시민들의 나들이 명소로 유명하며, 각종 상권, 금융기관, 음식점이 밀집된 도시기능의 중심지입니다.
온천2동
온천2동은 옛 동래읍 산저마을, 미남마을이라 불리던 미남부락이 1942년 10월 산저리(속칭 차밭골)의 일부와 합쳐지면서 부산부 동래출장소 온천2동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한낱 자연부락에 불과했던 온천2동은 대규모 주택단지일 뿐 아니라, 경부.남해고속도로의 접속지역으로 교통의 요충지이자 금정산의 수려한 경관아래 형성된 공기 좋고 물맑은 동네이기도 하며 동래의 신흥주택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온천3동
1979년 1월1일 온천2동에서 분동된 온천3동은 1960년대에는 온통 논과 밭으로 시골의 여느 모습과 다를 바 없었던 이 지역은 유동인구의 집중과 제2만덕터널 개통 등 교통량 폭주지역으로 변모했으며 이로 인한 숙박요식업소의 증가와 대형아파트 단지 등 신흥주택지로 변모해가고 있습니다.
사직동
조선시대에는 여고(余古)리와 석사(石寺)리 2개의 자연마을이 형성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옛 사직단의 이름을 빌어 사직동으로 불렀습니다.
사(社)는 토지신이고 직(稷)은 곡물신으로서 임금과 지방 수령(사또)이 제사를 드려 나라와 지방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곳이 바로 사직단입니다. 『동래부지』의 기록에 따르면 1640년(인조 18) 동래부사 정호서가 처음 사직단을 쌓았으며, 이후 1672년(현종 13) 동래부사 이하가 고쳐 지었다가 1709년(숙종35) 부사 권이진이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합니다. 관청에서 세운 사직단은 비록 없어졌지만 풍년을 기원하며 농민들끼리 제사를 올리던 풍습은 그대로 남아 당집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사직1동
서북쪽으로 금정산이 둘러 싸였고 거제동과 온천동 미남교차로 이어지는 삼각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산과 하천이 직접 닿지 않는 마을중의 하나인 사직1동은 교육 및 생활수준이 안정된 주택지역이며, 종합운동장이 인접한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사직2동
사직2동은 돌이 많아 돌짝골이라고 불렀다는 쇠미산 끝자락을 치고 올라가 대단위 아파트단지를 이루고 있는 마을입니다. 1969년 사직동 대규모 구획 정리에 이어 1974년에 정책이주지역으로 선정되면서 본격적인 주거지역으로 떠올랐습니다. 지금도 금정산의 자연경관과 온천시설의 집중으로 시민들의 나들이 명소로 유명하며, 각종 상권, 금융기관, 음식점이 밀집된 도시기능의 중심지입니다.
사직3동
사직3동은 1709년(숙종 35)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있었던 1940년대 석사와 여고 마을 중 여고 마을의 언덕배기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외곽의 한적한 마을이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온통 논과 밭, 미나리꽝이었던 이 일대는 여고부락 이웃에 집들이 조금씩 들어서고 마을 규모는 불어나면서 1979년 8월 8일 사직1동에서 나누어져 사직3동의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탄생하였습니다.
안락동
안락동은 조선시대 중기까지 동래부 읍내면의 동부에 속했던 호현리, 안락리, 충렬사리, 염창동, 구향교동 등을 포함하는 민가밀집지역이었습니다.
조선후기에 들어 염창(廉倉)은 염창(鹽倉)으로 바뀌었고 충렬사리와 안락리는 서원 마을으로 바뀌어 호현, 화현 등 4개 마을을 합해 원리라 불렀습니다. 원리란 서원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송상현, 정발 장군 등을 모신 안락서원에서 동의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안락1동
조선시대 동래부 읍내면 지역으로, 서원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원리(院里)라고 불렀으며, 1940년대 원리(서원 마을)은 현재의 충렬사사무소와 그 마당에 있던 30여호의 작은 마을이었으며, 개인의 농장과 단감나무가 많았던 곳이었습니다. 또한 산자락의 모양이 소쿠리 같다고 하여 '소쿠리터'로 불렀던 현재의 충렬사 뒷 편 망월산은 달구경하기 좋은 산이라 하여 망월산이라고 했다는 이야기와 동래읍성의 일부로 왜놈들의 침략을 망보던 산이라고 해서 망월산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락2동
1960년대 안락2동은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는 화현 마을을 형성했던 40~50가구 뿐이었으며, 충렬로와 철길 건너편은 온통 논과 갈대밭으로 시골의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변모하기 시작한 안락2동은 크고 작은 아파트, 공장, 주택이 들어서면서 신흥 주거지역으로 바뀌었습니다. 또 월성 박씨의 선조 15분의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음력 10월 5일이면 묘사를 지내고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박씨재실'과 1920년대 온천천 일대 갯벌을 개간하여 논밭을 만들고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 준 공덕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오남근 공덕비' 등이 구수한 옛 이야기를 묻어나게 한답니다.
명장동
명장동은 조선초기까지 동래현 명장이란 이름으로 불렸다가 1910년 읍내면에 소속, 1959년 부산시 동래구 명장동으로 이름하게 되었습니다.
1975년 이전까지는 미나리밭과 동네를 둘러싼 산과 약간의 밭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촌이었으나, 1975년 안락북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되면서 도시의 형태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명장동의 이름에 관한 유래는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말로 전하는 것에 따르면 명편을 보관했던 곳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명편이란 의장 때 쓰는 기구의 하나로 이를 흔들어 소리를 내어 군중들을 조용하게 하는데 사용된 물건으로 일명 정편이라고도 한답니다. 동래부사는 동래독진을 지휘하여 동래뿐만이 아니라 인근 양산, 기장의 군사까지 호령하였는데 이때 사용하던 명편을 이곳에 보관케 하였다하여 명장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명장동에는 명장 외에도 안마실, 세실곡 등의 자연 마을이 있었으며 명장정수관리소가 설치되어 수질 좋은 물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동래구의 변두리였던 명장동은 80년대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아파트단지, 학교설립등으로 인한 인구증가로 지난 1990년 1월 1일 명장1, 2동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명장1동
명장1동은 동래의 사라져가는 옛 동산들 중에서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는 산인 옥봉산 자락에 둘러싸여 있다. 우람한 산등성이는 동래구 명장동과 해운대구 반여동, 금정구 서동을 나누는 마을의 뒷동산이 되어 있습니다.
명장2동
명장2동은 조선시대 동래현 명장으로 불리다가 1910년 읍내면에 소속, 1959년 부산시 동래구 명장동으로 불렸으며, 1990년 1월 1일 명장동에서 분동되어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탄생했습니다.
1960년대에는 미나리꽝과 나지막한 야산으로 이루어져 시골의 여느 마을과도 다를바 없는 변두리 마을이었으나, 1980년대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아파트단지와 주택, 학교설립 등으로 신흥 주택지로 변모했습니다.
아파트촌과 중·소형 연립아파트, 다세대 주택들이 잇달아 늘어남으로서 자연 마을이 갑자기 도시로 탈바꿈한 신흥 개발지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대명여자고등학교 아래에 있는 속칭 「 개구리 마을 」 이라고 불리는 영세 판자촌은 명장2동의 개발을 가로막고 있기도 합니다. 개구리 마을 이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웃논이나 미나리꽝에서 개구리를 잡아 약용으로 말려 팔아 생활하는 사람이 많아 붙여진 이름입니다. 명장2동은 이같은 영세민 밀집지역으로 도시기반시설이 미비한 반면 중 ·소형 아파트와 교육시설의 밀집지역인 신흥 개발지로서 변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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