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3.1독립만세의 역사성

- -동래 선열들의 국난극복 정신을 이어받기 위하여 1919년 당시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구 하나은행 동래지점에서 복산동주민센터까지 570m를 동래구에서 만세거리로 지정하고, 1996년부터 매년 3월 1일 독립만세 재현행사를 개최하여 오다 1999년부터 동래문화원에서 주관해 오고 있음.
- -1996년 3월 1일 동래 사적공원에 내 고장 내 겨레는 우리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부산의 3.1독립운동약사와 함께 높이 21.6m, 좌대는 29m × 29m의 부산 3.1독립운동기념탑을 건립하고 기념식을 거행해 오다 2003년부터는 당시 만세운동의 주역을 기리는 뜻에서 장소를 옮겨 동래고등학교(옛 동래고보)에서 기념식을 개최하게 되었음.
특히 청소년들에게 국난극복의 민족정신을 체험적으로 계승하게 함으로써 민족성을 일깨우고 현 시대적 조류에 걸맞는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고 애국애향의 정신을 고취하고자 함. 3월7일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대표(연희전문 김아무개)는 동래고보 학생대표 김귀룡, 고영건, 엄진영 등을 찾아가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함께 봉기할 것을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동래고보는 졸업반 4학년생인 엄진영, 김귀룡, 고영건, 김인호, 이상덕, 박득용, 윤삼동, 이병심, 손정줄, 배대효, 박임갑, 김철규 등이 시위를 모의하고 각 학급의 연락을 위해 3학년 추규영, 김원료, 김기삼, 손영수, 정호종, 박종관, 서진령 등과 2학년 이수열, 임명조 등을 비밀리에 모아 전 학생이 총궐기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렇게 학생들의 시위가 무르익고 있을 때인 3월 10일경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경성공업고등학교에 재학중인 곽상훈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동래에 내려왔다. 곽상훈은 도착 즉시 당시 동래고보 수학교사였던 이환을 찾아가 3.1독립운동 시위를 상의하였다. 이환, 김병규 교사의 지원으로 사기가 고조된 학생들은 거사일을 동래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로 잡고 고영건의 하숙방에서 서진령, 엄진영, 김인호 등이 학교에서 옮겨온 등사판을 이용해 독립선언서 500장과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2개의 기치와 수백장의 태극기 그리고 ‘오왕독살(吾王毒殺)’이라는 수백장의 전단을 준비하였다. 이와 같이 만반의 준비를 갖춘 동래고보 주동학생들은 동래 장날인 13일 약속된 오후 2시가 가까워지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동네 부인네들도 몰래 전달받은 태극기를 감추어 동래군청(현 동래부동헌) 앞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약속된 2시를 기해 엄진영은 군청 앞 망미루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주위에 모였던 200여명의 학생들과 부인네들을 비롯한 장꾼들이 일제히 호응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2개의 기치가 세워지고 독립선언서와 ‘오왕독살(吾王毒殺)’이라고 쓴 수백장의 전단이 뿌려져 시장은 삽시간에 흥분의 도가니로 가득찼다. 이 때 학생들의 동태를 살피던 일경들도 극도로 당황하였고 그 중 한국인 경찰 한 명과 헌병보조원 한명이 갑자기 모자와 제복을 벗어버리고 속옷차림으로 군중에 호응하여 감격에 넘쳐 만세를 불렀다. 참으로 민족정기가 분출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일본경찰들은 시위군중과 학생들을 향해 발포를 하면서 폭압적인 진압에 나서 주동학생을 모두 검거하였다. 당시 시위에 참가하였던 학생들은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형을 받았다. 한편 학생들이 검거된 뒤 다음 장날인 3월 18일에는 일반군중들이 동래경찰서에 달려가 항의 시위를 계속 하였다. 이를 볼 때 당시 동래고보생들의 시위가 얼마나 동래지역민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학생들이 갇혀 있는 동안 동래사람 모두가 하나 되어 사식(私食)을 넣어주었던 동족애는 역사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3. 18. 범어사 명정학교, 3. 29. 구포장터만세운동이 일어나는 등 부산 경남 지역 3.1독립만세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