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정 의사
출생과 성장
1) 항일 분위기에서 출생하여 성장하다.박차정의사
박차정은 1910년 5월 8일 경남 동래 복천동 417번지에서 아버지 박용한(朴容翰)과 어머니 김맹련(金孟蓮)의 3남(문희, 문호, 문하) 2녀(수정, 차정) 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일찍부터 신문물에 눈을 떠 한말 동래 지방의 신식학교인 개양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탁지부 주사를 역임한 측량기사였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제의 무단정치에 비분강개하여 1918년 1월 유서 한통을 남기고 자결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어머니 김맹련은 5남매를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삯바느질을 하는 등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어머니 역시 사상적으로 무장된 그런 분이었는데, 동래군 기장면 출신으로 일찍이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과 의형제를 맺었던 약수(若水) 김두전(金枓全)과는 육촌사이었고 김두봉(金枓奉)과는 사촌의 사이었다.
이 같은 집안의 가계로 보더라도 어머니 역시 잠재된 강한 사상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기에 박차정은 어려서부터 식민지 현실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박차정의 가족은 1918년에 설립된 동래 성결교회에 출석한 교인이기도 하였다.

2) 동래일신여학교에서 항일의식을 심화하다.
1924년부터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던 박차정의 항일의식은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이 학교는 1895년 호주장로교여자선교회연합회의 여자전도사들이 좌천동의 한 초가에서 소녀들을 모아 주간학교를 차리면서 부산진일신여학교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1925년 동래로 신축 이전하여 동래일신여학교라고 이름을 고쳤다. 일신여학교는 선교계 학교이면서도, 민족정신의 함양을 중요시 하여 조선어·역사·지리 등의 교과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때문에 많은 민족운동가를 키워내 1919년 3·1운동시에는 부산지역의 만세운동 전개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민족적 전통을 갖고 있었던 학교에 입학하게 되니 가정에서 키워온 항일의식이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차정은 이때부터 우리 민족의 비극을 말하면서 이 비극을 극복하는 길은 독립이고 독립을 위해서는 애국지사들이 벌이고 있는 독립운동에 동참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다녔다. 일신여학교의 동맹휴학은 항상 박차정이 주모자가 되었다.
당시 박차정의 항일의식과 현실관은 그가 동래일신여학교의 교지였던 『일신(日新)』 2집에 실은 「철야(徹夜)」라는 글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글은 자전적 성격을 지녔던 글로서, 일제하에 옥사를 한 어떤 독립투사의 아들과 딸이 고아가 되어서 추운 겨울밤 사회의 냉대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밤을 밝히는 것이다. 이는 일제하 우리 민족의 고난을 상징화한 것으로, 어려운 가운데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서 이겨나가겠다고 하는 민족의 해방에 대한 강한 염원을 담고 있는 글이라고 하겠다. 박차정은 당시 문재가 뛰어나 이 외에도 시 「개구리」, 수필 「흐르는 세월」 등의 글을 교지에 실었다.
학창시절의 이러한 철저한 항일의식과 투쟁정신은 자신의 오빠인 박문희·박문호에게서 영향 받은 바가 컸다. 당시 박문희는 일본대 경제과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후 동래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며 청년운동에 앞장서고 있었으며, 1927년 신간회가 창립되면서 신간회의 주도층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둘째 오빠 박문호 역시 민족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또한 박차정은 당시 동래청년동맹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숙부 박일형(朴日馨)으로부터도 사상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 박차정은 이 때 교제한 인물들의 영향과 이념서적의 탐독으로 사상적으로 한층 원숙한 상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근우회가 설립되면서 동래 지회의 설립에 앞장섰다.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것은 1929년 3월 9일이었다.
박차정의사의 국내에서의 여성해방운동, 민족해방운동
1) 근우회 여성운동 지도자로 활동하다.
박차정이 전국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에 주도층으로 참여하게된 것은 근우회활동에서 부터였다. 1924, 5년경부터 민족해방운동 내 일각에서 논의되던 협동전선론은 1926년 초부터 구체적인 움직임이 되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11월의 ‘정우회선언’이후 온 운동계를 휩쓸었다. 여성운동계에서도 협동전선론이 논의되어 여성운동의 전국적 통일기관의 결성으로 나갔고 마침내 1927년 5월에 근우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근우회는 기독교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계열의 여성단체와 사회주의계열의 여성단체들이 모두 참여한 통일기관으로 출발하였다.
근우회는 신간회와 같이 반제 반봉건운동을 자기 과제로 하고 그 강령을 “첫째, 조선여자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키 위하여 공고한 단결과 의식적 훈련을 기하며, 둘째, 조선여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전적 이익의 옹호를 기한다”고 하였다. 행동강령으로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 일체 차별 철폐,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타파, 인신매매 및 공창의 폐지, 농민부인의 경제적 옹호, 부인노동자의 임금차별 철폐 및 산전 산후 임금 지불 등을 주창하였다.
근우회는 회장체제가 아니고 중앙집행위원회에 의해 움직여졌다. 제1기의 중앙집행위원 21인은 재경(在京) 활동가로 채워졌으며 민족 사회 양 진영이 균형을 이루었다. 그런데 지방에 지회들이 속속 설립되고 그 대의원들에 의해 전국대회가 치뤄진 1928년부터는 지회출신이 대거 참여하게 되고 사회주의 진영이 압도하게 된다. 당시 지회는 대략 64개 지역에 설립되었는데 사회주의계가 60%, 사회 민족 양 진영이 협동한 곳 19%, 민족주의계가 21%였다.
박 차정이 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고 중앙회에서 본격 활동을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근우회의 변화 속에서 제2회 전국대회가 열렸던 1929년 7월에서 부터였다. 이 때 박차정은 경남의 전형위원으로, 33인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으로, 또한 33인 중에서 선정된 14인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담당했던 업무는 선전조직과 출판부문이었다.
박차정이 주도하고 있었던 동래지회는 1928년 5월 10일에 결성되었으며 사회주의계열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지회였다. 당시 동래에는 1921년 5월에 결성되어 활동하여온 동래여자청년회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1928년 4월 20일 제7회 정기총회에서 여자청년회를 해체하고 근우회 지회를 설치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지회가 조직되었다. 이때 여자청년회에서는 “동회의 강령과 목적이 근우회와 같은 이상 따로이 한 단체를 만들어 둘 필요가 없음으로” 여자청년회를 해체한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의 근우회의 조직원칙을 충실히 이행한 대표적 케이스로, 연령상 청년에 속하는 회원은 동래청년동맹에 입맹키로 결정하였다. 동래지회는 1929년 전국대회에서는 ‘동일노동에 대한 임금차별 철폐건’을 건의하였으며, 1929년에는 사무실을 수색당하면서 모든 문서를 압수당하기도 하였다. 동래지회는 당시 많은 지회 중 가장 확실한 이념을 갖고 운동을 전개하였던 지회로서 중앙회에서도 인정을 받았는데 이는 박차정을 중심으로 동래지역에서의 청년운동 여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왔기에 가능하였다.
2) 근우회사건으로 검거, 구속되다.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출판과 선전일을 맡았던 박차정은 명실상부하게 근우회의 핵심간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 때 근우회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전개된 서울 여학생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이것이 바로 근우회사건인데, 여기서 박차정이 중심역할을 하였다.
이 사건 이전에도 근우회는 창립당시부터 동맹휴교 등 학생운동에 대한 일련의 조사와 지원을 계속 해왔고, 1929년 7월 대회에서는 “교육의 성차별철폐와 여자의 보편교육확장”을 결의하였다. 그 후 전주여자고보사건의 맹휴를 지도하였고, 11월 광주학생사건에 이어 12월 서울에서 학생시위사건이 있었을 때는 배후세력으로 주목되어 근우회의 박차정·허정숙·정종명이 신간회의 인사들과 함께 검거되기도 하였다.
이후 구속학생의 석방과 학생들에 의한 보다 구체적 행동과 민중적 봉기를 목적으로 한 제2차 시위운동이 1930년 1월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근우회가 바로 리더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이 근우회사건은 박차정·허정숙이 “대중적 위력으로 민족적 항의를 보여줌으로써 구속학생을 석방하고 민족적 기치를 들기 위해 시내 각 여학교의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도하자”고 결의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1월 15일 오전 9시 30분 일제히 시위를 하였는데, 참가학교는 이화·숙명·배화·동덕여고보, 근화·실천·정신·태화여학교, 여자미술·경성여자상업·경성보육학교 등 11개 학교였다. 이러한 시위를 준비하는데 허정숙과 박차정이 앞장서서 각 학교의 대표들을 만나 학교의 분위기와 사정을 알아보고 각 학교끼리의 연락 방법 기타 일체의 것을 지시하였다. 사건 발생 직후 이와 관련하여 정종명·박호진·정칠성·한신광·허정숙·백덕수·박차정·류덕희 등이 검거되었으며 최종적으로 허정숙과 박차정이 보안법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박차정은 처음 서대문서에서 취조를 받다가 일시 석방되었지만 1930년 2월 고향인 동래에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 유치되었다. 이후 세 차례의 심문 후 2월 15일 기소되지 않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감시는 계속 되었고, 2월 20일에는 서대문경찰서에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기소가 성립된다는 의견서가 제출되기도 하였으나, 2월 28일에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불기소로 처리되었다.
박차정의사의 국외에서의 민족해방운동

1)중국으로 망명하여 결혼하고 의열단 요원이 되다.
박차정은 이때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몸이 상하여 불기소로 나온 후 한 달간 꼬박 누워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의열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둘째 오빠 박문호가 보낸 청년을 따라 중국땅으로 망명하였다.
이때가 대략 1930년 3, 4월쯤이었다. 박차정은 상해를 거쳐 북경으로 가서 당시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주력하고 있었던 김원봉의 의열단에 합류하여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부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약산 김원봉과 1931년 3월에결혼하였다.
이후 박차정은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의 핵심멤버로서 활약하였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로 폭력을 독립투쟁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보고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수뇌, 대만총독, 매국적, 친일파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 등을 암살대상으로 규정하고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기관을 파괴대상으로 정하였다. 약산이 이끌던 의열단의 암살 파괴운동은 제1차, 2차, 3차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막을 내린다. 그리고 이즈음 세계적인 사회주의운동의 성장과 국내의 노농대중운동의 발전은 의열단에도 변화를 요구하게 되고 의열단의 자금모집이 힘들어지면서 의열단의 활동은 침체기에 들어갔다. 김원봉은 1926년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고 많은 사람을 사귀었는데, 이때 사귄 사람들이 이후의 의열단의 활동에 큰 힘이 돼 주었다.
김원봉은 1928년 상해에서 안광천과 만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폈으며, 곧 북경으로 가서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1929년 말)을 세움과 동시에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운영하였다.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은 중앙부를 두고 조선지부(1931. 4), 북경지부(1930. 8), 만주지부(1930년 말)를 두었다. 박차정은 안광천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앙부에서 김원봉·박건웅·박문호·이영준·이현경 등과 함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레닌주의정치학교는 1930년 4월부터 1931년 2월 사이 2회에 걸쳐 21명의 학생을 훈련시켜 국내로 보냈다. 그들의 대부분은 서울의 공산청년동맹 준비위원회 및 강릉농민조합운동과 관련해 1934년 체포되었다.
2) 의열단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 활약하다.
1932년 남경으로 옮긴 후 박차정은 김원봉을 도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개설을 준비하였다. 약산은 국민당정부와 제휴하여 혁명간부학교를 개설키로 하여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학생을 모집하였다. 특히 국내에서 학생을 모집하여 올 것을 구상하고 이에 노력하였다. 바로 이 일에 적극 협력한 사람이 박차정의 오빠 박문희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개설에 앞장섰던 박차정은 1932년 10월 20일 개교하자 여자부의 교관으로 여자부의 교양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또한 간부학교의 교가도 작사하였다고 전하여 진다. 이때부터 박차정은 임철애(林哲愛)라는 가명으로 더 잘 알려졌으며 일본측의 자료에도 이 이름이 더 많이 나온다. 혁명간부학교의 교관들은 대개 의열단원으로 오랜 경험을 쌓아온 인물들이었다.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각종 비밀공작법을 가르치는 한편 학생들의 혁명의식을 강화하고 실천운동에서 필요한 변론을 훈련시키기 위해 1주일에 한번씩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1933년 4월에 1기 졸업생을 내고 1936년 10월까지 3기의 졸업생을 냈다. 졸업생들은 공작임무를 부여받고 2-3명이 한조가 되어 공작지로 떠났는데 제1기생에게는 조선과 만주에 의열단 지부를 만들도록 하였고, 제2기생에게는 노동자 농민 학생 등 기본군중에 기초하여 유격대를 조직하라는 임무를 부과하였다. 이러한 의열단의 국내공작은 실패로 돌아가 1936년 당시 체포된 사람이 1기생 12명, 2기생 14명, 3기생 1명, 교관 1명, 모집 연락원 7명 등 모두 35명이었다.
3) 민족혁명당의 남경부녀회를 결성하여 활동하다.
1935년 7월 남경에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박차정은 핵심멤버로 활동하였다. 김원봉의 의열단은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한독립당과 함께 유일당 결성을 위해 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다. 민혁당은 좌우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진보적인 내용의 17개 강령을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 몇 개를 보면 (1)구적 일본의 침략세력을 박멸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확립하고, (2)봉건세력 및 일절의 반혁명세력을 숙청함으로써 민주집권제의 정권을 수립하며, (9)토지는 국유로 하고 농민에게 분급하고, (11)국민의 일체의 경제활동은 국가의 계획하에 통제한다고 하였다.
박차정은 1936년 7월 16일에 지청천 장군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혁당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여성들을 전체 민족해방운동에 편입하고자 하였다. 해외 조선부녀의 총단결로 전민족적 통일전선을 편성하기 위해 결성된 부녀회의 기본인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조선의 여성은 오랫동안 전통적 속박으로 인권이 유린되어 왔고 다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생존권을 박탈당함으로써 전통적 속박에 의한 가정의 노예일 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약탈시장의 상품으로 임금노동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 아래 선각적 여성들에 의한 활동이 있었지만 일본경찰의 탄압과 지도부의 불통일에 의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지 못하였다. 또한 부녀 대중과 유리된 몇몇의 간부들의 운동이어서 전 민족 혁명운동과 연결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 운동이 대단한 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우리 조선부녀를 현재 봉건적 노예제도 하에 속박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이고, 또 우리를 민족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이다. 우리들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 다면 우리 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지적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또 일본제국주의가 타도된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혁명이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방면에서 진정한 자유 평등의 혁명이 아니라면 우리 부녀는 철저한 해방을 얻지 못한다.
즉 부녀회 창립 선언에서 조선의 부녀들도 총단결로 전민족적 통일전선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며, 여성의 진정한 해방은 일본 제국주의의 타도에 있고, 또한 함께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의 혁명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여성의 해방, 제국주의의 타도, 혁명의 진행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구호에서도 역시 “전조선 부녀는 총단결하자, 민족혁명전선에 무장 참가하자, 남녀의 차별을 철폐하자, 각국 부녀해방운동과 연결하자”고 내세웠다. 민족해방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을 동시에 이루어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부녀회의 기본인식과 구호는 과거부터 오랫동안 민족문제와 동시에 여성문제를 고민해왔고 민족운동과 여성운동을 해왔던 박차정의 기본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4) 조선의용대의 복무단장으로 맹활약하다.
민족혁명당은 일본이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본격적인 침략을 감행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과 함께 1937년 11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창립을 선언하였다. 민족전선의 목적은 조선 국외 및 국내의 전민족혁명가를 망라하는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중한 민족연합전선을 결성하고, 직접 혹은 간접으로 현재 전개되고 있는 중국의 항일전선에 참가하는 일이었다.
당시 박차정은 한구에 머무르면서 여기에서 개최된 만국부녀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고, 장사에 있었던 임시정부에 특사로 파견되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규탄하는 라디오 방송을 하였다. 박차정은 임철애(林哲愛)라는 이름으로 『조선민족전선』창간호에 「경고일본적혁명대중(敬告日本的革命大衆)」이라는 글을 실었는데, 이는 앞서의 방송 원고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실은 것이었다. 이 글에서 박차정은 일본제국주의는 중국과 조선, 그리고 일본 민중의 적이므로 우리들은 반드시 긴밀하게 연합하여 공동의 적을 타도하고 진정한 동아시아의 평화를 건설하자고 호소하였다. 나아가 이번 중일전쟁에서 일본제국주의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고 아울러 동방의 피압박대중들은 해방될 것이니, 일본 혁명대중들이 국내의 혁명전쟁을 일으켜 파쇼군벌을 제거하는 것이 자유와 해방을 얻는 길이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제3호(1938. 5. 10)와 제5·6호(1938. 6. 25)에서는 「조선부녀여부인운동(朝鮮婦女與婦女運動)」이라는 장문의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박차정은 먼저 ‘조선 부녀의 생활현상’에서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착취 단계에서 조선부녀의 생활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부녀운동’에서는 여성운동을 3·1운동 이전, 3·1운동기, 3·1운동 이후, 1927년 이후, 광주학생운동 이후시기로 나누어 고찰하고, 이제 중국의 전면 항일전쟁이 시작된 시점에서 우리 부녀자들도 일치단결하여 일어나 신성하고 위대한 민족해방전쟁에 참여하여서 조국의 자유 회복, 동아의 화평, 인류의 정의를 위해 투쟁하자고 호소하였다.
이 글은 앞서의 남경부녀회의 선언문과 입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여성운동과 민족해방운동과의 접목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소수 지식층여성이 중심이 되는 여성운동, 또는 개별적 사안에 대한 여성운동이 아무런 성과를 가져다주지 않음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1938년 10월 10일 한중연합전선의 형식을 빌려 항일무력으로서 조선의용대를 한구(漢口)에서 결성하였다. 김원봉 등에 의해 지도되었던 초기의용대는 조선민족입장에서의 중국항전참가, 일제타도, 조국해방의 임무를 자임하고 창설되었고 그를 수행하기 위한 공작으로 전선공작, 적후공작, 동북진출 세 가지를 설정하였다. 박차정은 22명으로 구성된 대본부(隊本部) 부녀복무단의 단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때 박차정은 의용대원들에게 인간적으로도 매우 친절하게 대하였으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투쟁에 앞장섰다. 당시 의용대 본부에는 최동선(여)을 단장으로 하는 31소년단이 있었고, 여자포로들도 훈련소에서 1개월의 훈련을 마친 후 퇴소함과 동시에 의용대 대원으로 전입되어 의용대내에 여자대원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박차정은 이러한 여성대원들의 선봉에서 싸웠다. 1940년 당시 의용대 대원수는 총 314명에 달하였다. 이즈음 1939년 2월 박차정은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 참가하여 부상을 당하였다. 이는 여사가 의용대의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음을 말해준다.
조선의용대는 1941년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4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황하를 건너 화북으로 진출했다. 화북으로 진출한 조선의용대는 태항산맥 일대의 팔로군(八路軍) 구역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제휴하여 활동하기에 이르렀고, 김원봉의 화북행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의용대 주력부대와의 연계 및 그 지도권까지도 상실하게 되었다.
중경에서 의용대 일부만을 지도하고 있었던 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은 1941년 12월에 임정참여를 당의 확고한 노선으로 정하고 임정개조투쟁에 참여하였으며 44년 5월에 임정의 군사를 통괄하는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중경으로 옮겨온 이래 박차정과 김원봉은 남안에서 살았는데, 박차정은 김원봉이 임정의 군무부장에 취임했던 즈음인 44년 5월 27일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39년 곤륜산 전투에서의 부상의 후유증이었다고 한다. 박차정은 병상에 있으면서 조국의 해방과 혁명을 완수하는데 참여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글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35세의 나이로 어려서부터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을 위해 항일투쟁에 혼신을 다했던 박차정은 해방을 1년 앞두고 꿈에도 그리던 민족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해방 후 김원봉은 꼭 간직했던 박차정의 부상 당시에 입었던 ‘핏덩이가 말라붙은 속적삼’을 가져와 친가동생인 부산의 박문하(朴文夏)에게 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귀국하면서 박차정의 유골을 가져와 자신의 고향인 경남 밀양 감전동 뒷산에 안장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 출처 : 국가보훈처 민족정기선양센터 자료실(이달의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