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수암
- 김영규
- 박차정
- 윤장수
- 추규영
- 오규환
- 정호종
- 권철암
- 김영찬
- 백광흠
- 이관수
- 한형석
- 오기원
- 차병곤
- 김갑
- 김옥겸
- 신두성
- 이봉우
- 한흥교
- 윤경봉
- 차상명
- 김귀룡
- 김윤희
- 양수근
- 이상덕
- 허영호
- 윤삼동
- 최장학
- 김규원
- 김인호
- 양태용
- 정성언
- 허치옥
- 김달수
- 문인갑
- 김규직
- 김한기
- 엄병영
- 임명조
- 박성봉
- 김도엽
- 박세현
- 김기삼
- 문시환
- 엄진영
- 정인찬
- 어소운
- 김반수
- 박영준
- 김법린
- 박영출
구수암
| 이름 | 구수암 (具壽巖)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구 수 암(具壽巖) 1901. 2. 1~1920. 5. 1
부산 동래(東萊)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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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규
| 이름 | 김영규 (金永奎)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김 영 규(金永奎) 1898. 9. 13~1952. 7
부산(釜山)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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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 이름 | 박차정 (朴次貞)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임정,중국방면 |
| 자료내용 | 박차정(朴次貞) 1910. 5. 7~1944. 5. 27 이명:哲愛,朴哲愛
부산(釜山)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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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장수
| 이름 | 윤장수 (尹章守(尹張守))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윤장수 (尹章守(尹張守)) 1910. 5. 7~1944. 5. 27
부산(釜山)사람이다.
-출신지: 부산 동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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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규영
| 이름 | 추규영 (秋圭映)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추 규 영(秋圭映) 1901. 8. 21~1977. 3. 24
부산 동래(東萊)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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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환
| 이름 | 오규환 (秋圭映)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오규환 (秋圭映) 1901. 8. 21~1977. 3. 24
부산 동래(東萊)사람이다. 1919년 3월 7일부터 12일까지 기간에 동래군(東萊郡) 동래면(東萊面) 복천동(福泉洞)에서 동래고등보통학교(東萊高等普通學校) 재학생인 엄진영(嚴進永),김귀룡(金貴龍),고영건(高永建) 등과 같이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학교비품과 등사판으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500여매와 다량의 태극기(太極旗)를 인쇄하여 3월 13일 동래군청(東萊郡廳) 앞에서 장날에 모인 다수 군중에게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와 태극기(太極旗)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피체되었다. 동년 4월 30일에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8卷, 國家報勳處, 1990年, pp.541~542. 註,名籍簿(釜山矯導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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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종
| 이름 | 정호종 (秋圭映)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정호종 (秋圭映) 1901. 8. 21~1977. 3. 24
부산 동래(東萊)사람이다. 1919년 3월 7일부터 12일까지 기간에 동래군(東萊郡) 동래면(東萊面) 복천동(福泉洞)에서 동래고등보통학교(東萊高等普通學校) 재학생인 엄진영(嚴進永),김귀룡(金貴龍),고영건(高永建) 등과 같이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학교비품과 등사판으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500여매와 다량의 태극기(太極旗)를 인쇄하여 3월 13일 동래군청(東萊郡廳) 앞에서 장날에 모인 다수 군중에게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와 태극기(太極旗)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피체되었다. 동년 4월 30일에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8卷, 國家報勳處, 1990年, pp.541~542. 註,名籍簿(釜山矯導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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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철암
| 이름 | 권철암 (權鐵巖)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권 철 암(權鐵巖) 1901. 5. 10~1936. 6. 18
부산 동래(東萊)사람이다. 1919년 3월 13일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입수한 권철암등은 28일 김도엽(金道燁),김수룡(金壽龍),최창용(崔昌鎔)등과 함께 동래군 기장읍(機張邑) 사무소에서 은밀히 독립선언서 4백매를 복사하였다. 동년 4월 5일 기장읍 장날이 되자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배포하며 만세시위를 주동하였으며, 이어 4월 8일,10일,11일에 걸쳐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1919년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확정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8卷, 國家報勳處, 1990年, p.319. 註,判決文(1919. 5. 1 釜山地方法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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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찬
| 이름 | 김영찬 (金永瓚)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 자료내용 | 김 영 찬(金永瓚) 1924. 2. 2~ 號 : 松巖
부산 동래(東來)사람이다. 1942년 봄부터 동래중학교 항일학생조직인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에 가입하였다. 조선독립당은 1941년 겨울에 동래중학생 김일규(金一圭),양중모(梁仲模) 등이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서약하고, 자신들이 앞서 1940년에 조직했던 독서회를 강화, 개편한 단체이다. 1942년 봄, 2차 회합 때 동당은 강령을 정하고 항일투쟁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세우며 본격적인 행동준비에 들어갔는데 그는 제2차 회합이후 조선독립당에 입당하였다. 이들은 1943년 졸업과 함께 실제행동을 개시하였으며 당원 간의 연락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암호로 취하도록 하였다. 이때 그는 청소년 훈련과 병기계통 연구를 담당하는 한편 행동반으로 활약하였다. 1944년 8월 1일에 동당원들은 그 동안의 활동을 정리, 분석하고 군사기밀 탐지, 일군 탄약고 폭파, 군용열차 통과시 구포(龜浦)다리 폭파 등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만약 거사가 실패할 경우에는 일군에 입대한 후 연합군 진영으로 탈출하여 중국에서 다시 만난다는 대비책도 세워 놓았다. 한편 조선독립당은 항일결사 자일회(紫一會),순국당(殉國黨) 등 과도 연락을 통하면서 항일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하려 했다. 특히 순국당은 1944년 5월 결성때부터 조선독립당원 이관수(李觀洙)가 그 조직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조선독립당과 행동내용, 조직 등이 거의 같았을 뿐아니라 조선독립당의 세포당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 1944년 7월에 순국당의 조직이 일경에 탄로가 나게되어 동년 8월에 조선독립당의 조직도 발각되었다. 그도 이때 당원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음.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6卷, 國家報勳處, 1988年, pp.270~271. 註,釜山矯導所長發行 收監者名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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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흠
| 이름 | 백광흠 (白光欽)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애국계몽운동 |
| 자료내용 | 백 광 흠(白光欽) 미상 ~1927. 12. 13
경상남도 동래(東萊)군 동래면 복천(福泉)리에서 태어났다. 1909년 신민회 계열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박중화(朴重華) 신백우(申伯雨) 안희제(安熙濟) 남형우(南亨祐)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창립하여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10월 인쇄직공 친목회, 노우회, 이발조합, 전차종업원회, 양복직공조합, 조선노동공제회를 비롯한 진주 노동공제회, 대구 노동공제회, 안동 노동공제회, 감포노동공제회, 반도 직공조합 등 10여 노동단체를 연합하여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를 창립하고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조국광복을 위해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143~144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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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수
| 이름 | 이관수 (李觀洙)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 자료내용 | 이 관 수(李觀洙) 1925. 10. 22~1951. 12. 25
부산 동래(東來)사람이다. 동래중학교 재학중 1941년 겨울에 항일학생조직인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 결성에 참가하여 당원으로 활약하였다. 조선독립당은 동래중학생 김일규(金一圭) 양중모(梁仲模) 등이 앞서 1940년에 조직하였던 독서회를 강화, 개편한 것으로서 당원들은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였다. 1942년 봄에 당원들은 남기명(南基明)의 집에서 2차 회합을 갖고 강령을 정하는 한편 항일투쟁에 관한 구체적인 방안을 세우며 본격적인 활동준비에 착수하였다. 그후 당원들은 여러차례 비밀회합을 거듭하면서 행동방략을 협의하다가 1943년 졸업과 동시에 실제행동을 개시하였으며 당원간의 연락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암호로 취하도록 하였다. 1944년 8월 1일에 동당원들은 양중모의 집에 모여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 분석하고 군사기밀 탐지, 일군탄약고 폭파, 군용열차 통과시 구포(龜浦)다리 폭파 계획 등을 세웠다. 그리고 만약 거사가 실패할 경우에는 일군에 입대한 후 연합군 진영으로 탈출하여 중국에서 다시 만난다는 대비책도 세워 놓았다. 한편 조선독립당은 항일결사 자일회(紫一會) 순국당(殉國黨) 등과도 연락을 통하면서 항일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자 했다. 특히 순국당은 그가 1944년 5월 결성때부터 조직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조선독립당과 행동내용, 조직 등이 거의 같았을 뿐 아니라 조선독립당의 세포당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 1944년 7월에 순국당의 조직이 일경에 탄로 나게되어 동년 8월에 조선독립당의 조직도 발각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도 당원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었다. 피체후 그는 미결수로 부산형무소에서 1년여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6卷, 國家報勳處, 1988年, pp.270~271 註,釜山矯導所長發行 收監者名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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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석
| 이름 | 한형석 (韓亨錫(韓悠韓))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광복군 |
| 자료내용 | 한 형 석(韓亨錫) 1910. 2. 21~1996.6.14 號 : 悠雲, 민구름. 이명 : 韓悠韓
부산 동래(東萊)사람이다. 일찌기 부친 한흥교(韓興敎)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 신예(新藝)예술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9년 10월에 중경(重慶)에서 한국청년 전지공작대가 결성 되자 그는 예술조장으로 임명되어 군가인 "한국행진곡(韓國行進曲)","항전가곡(抗戰歌曲)"을 작곡하였으며, 서안(西安) 등지에서 "국경의 밤" "아리랑"등을 공연하여 군민(軍民)을 위안하고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1940년에는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 한청반(中央戰時幹部訓練 第四團 特科總大學員隊韓靑班)에서 교관을 역임하였다.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었으며, 그는 광복군가집 1,2집을 발간하고 국기가(國旗歌),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 등 항일 가곡을 작곡하였다. 1944년 10월 그는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에 피임되어 복무하면서 작곡 및 가극 활동으로 침체된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광복군과 중국군 연합전선을 한층 견고히 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77년에 건국포장을 받았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음.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음.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5卷, 國家報勳處, 1988年, p.1108.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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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원
| 이름 | 오기원 (吳基元)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오 기 원(吳基元) 1897. 12. 12~1940. 11. 22
부산 동래(東萊) 사람이다. 기미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5년전인 1914년 항일지하조직인 기장광복회(機長光復會)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4월 5일 동래군 기장면(機長面)에서 김도엽(金度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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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곤
| 이름 | 차병곤 (車炳坤)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 자료내용 | 차 병 곤(車炳坤) 1928. 5. 15~1945. 9
부산(釜山) 사람이다. 1943년 봄 부산실천상업학교 재학 중 부산진국민학교 동창생인 신정호(辛正浩)·박정오(朴禎五)·정오연(鄭五然) 등고 비밀경사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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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
| 이름 | 김갑 (金甲)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임정,중국방면 |
| 자료내용 | 김갑(金甲) 1889. 1. 7~1993. 3. 14 이명:진원(瑨源)
부산 동래(東來)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경남지역의 연락책임자로 활약하다가 일경에게 쫓기어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였던 그는 동년 4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大韓民國 臨時議政院) 경상도 대표의원(慶尙道代表議員) 및 군무위원회 이사(軍務委員會 理事),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차장(國務院次長), 교통부의원(交通部委員) 등으로 초기 임시정부 업무수행에 공헌하였다. 1921년 5월에 북경에서 개최된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국내노동당(國內勞動黨) 대표로 참석한 그는 그곳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하여 임시의정원을 취소하고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로서 대체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조선공화정부(朝鮮共和政府)를 수립하여 이상룡(李相龍)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재무총장(財務總長)이 되었다. 그리고 동년 10월에는 이승만(李承晩) 정한경(鄭翰景) 등이 미국정부에 제출한 위임통치청원서(委任統治請願書)가 무효임을 주장하고 통박하였으며, 1923년 6월 3일에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임정옹호파가 되어 창조파(創造派:반임시정부파(反臨時政府波))인 신숙(申肅) 윤해(尹海) 등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명의도용에 대하여 13도 총간부의 이름으로 성토 규탄하였다. 이어 1924년 12월에는 박은식(朴殷植) 국무총리의 조각(組閣)에 참여하여 노동총판(勞動總辦)으로 임명되었으며, 1926년 2월 14일 김구(金九) 국무령(國務領)의 추천에 따라 국무원(國務員)에 임명되었고 1927년 1월 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서 새로운 임정 약헌기초위원(臨政約憲起草委員)에 피선되었다. 또한 동년 2월 23일에는 상해인성소학교(上海仁成小學校) 진급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격려하였다. 1928년 7월 임시정부 이동녕(李東寧) 주석(主席) 재직시에 재무부장(財務部長)에 임명되었고, 1930년 3월에는 이동녕 김구를 따라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고 특사를 국내외로 밀파하여 취지 선전과 연락을 도모하였다. 1933년 3월 14일 상해(上海) 프랑스 조계(佛租界) 김신부로(金神父路) 광제의원(廣濟醫院)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8卷, 國家報勳處, 1990年, pp.371~373.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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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겸
| 이름 | 김옥겸 (金玉兼)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김 옥 겸(金玉兼) 1892. 3. 19~1957. 8. 30
경상남도 김해(金海)사람이다. 1919년 3월 29일의 구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학생인 양봉근(楊奉根)이 고향으로 내려와서 구포면서기 임봉래(林鳳來)를 만나 서울과 평양(平壤)의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함으로써 계획되었다. 그는 3월 27, 28일에 박영초(朴永初) 이수련(李守蓮) 등의 집에서 임봉래 유기호(柳基護) 윤 경(尹涇) 김윤길(金潤吉) 허 정(許楨) 김용이(金用伊) 최종호(崔鍾浩) 유진영(兪鎭榮) 윤대근(尹大根) 등과 만나 회의를 거듭한 끝에, 구포 장날인 3월 29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교대로 밤을 새워가면서 독립선언서와 소형 태극기 수백매씩을 제작하였고, 대형 태극기와 「대한독립 만세」라고 쓴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3월 29일 정오, 그는 구포장터에서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미리 제작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그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해 7월 16일 부산(釜山) 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출옥 후에는 1923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신호(神戶)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검속되기도 하였으며, 이듬해에 귀국하여 28 독립선언 대표중의 한 사람인 김철수(金喆壽)와 함께 양산(梁山) 지방을 근거로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만주(滿洲)로 건너가 정의부(正義府)에 가담하는 등 계속적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8卷, 國家報勳處, 1990年, pp.371~373.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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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두성
| 이름 | 신두성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신 두 성(辛斗星) 1890. 2. 17~1959. 9. 24
부산(釜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9일 부산 동래군 장안면(長安面) 좌천리(佐川里) 시장에서 김윤희(金允熙) 정지모(鄭智謀) 등과 함께 다수의 군중을 규합하여 5백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동 시장으로부터 울산(蔚山)으로 통하는 거리까지 시위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5월 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8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1卷, 國家報勳處, 1994年, p.163.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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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우
| 이름 | 이봉우 (李鳳雨)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독립장 (1980) | 운동계열 | 만주방면 |
| 자료내용 | 이 봉 우 (李鳳雨)1873.7.15~1921. 9.23
부산 동래(東萊) 사람이다. 1908년 연길현 합마당(哈 塘)으로 망명하였으며, 화룡현에서 1910년 정동(正東)학교 설립 등 육영사업에 이바지하였다. 1918년 11월 만주 길림(吉林)에서 김교헌(金敎獻)·김동삼(金東三)·이동녕(李東寧)·여 준(呂準)·이범윤(李範允) 등 38인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양하였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용정촌 국자가(局子街)에서 독립선언 축하회를 개최하였으며, 시위도중 중국군의 발포사건이 일어나자 구춘선(具春先)·강봉우(姜鳳雨)·고용환(高容煥)·강구우(姜九禹)·박승필(朴昇弼) 등과 함께 도윤공서(道尹公署)에 배상책임을 따지기도 하였다. 1919년 4월에는 만주에서 한국독립을 위한 한족독립기성회를 조직, 의사부원으로 구춘선(具春先)·마 진(馬晋)·유예균(劉禮均)·최원일(崔元一)·고용환(高龍煥)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0년 청산리독립전쟁에서 대승한 독립군은 일군의 추격을 벗어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노령(露領)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정부의 배반으로 독립군이 무장해제되고 참살당하는 자유시 참변이 있자, 1921년 9월 이에 대해 성토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1921년 6월 26일 노령 흑룡주 자유시에서 대한의용군이 노병(露兵)과 교전한 결과 사망자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된 자 250명, 포로 917명에 달하는 대참극을 연출하였다……" 이 성토문은 국민회·군비단(軍備團)·광복단·신민단·농민회·공의단(公義團)·태극단·의민단·청년독립단·야단(野團) 대표들이 서명 발표하였는데, 그는 국민회 대표로서 구춘선(具春先)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와 연락을 위하여 상해로 가던 중 일경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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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교
| 이름 | 한흥교 (韓興敎) | 출신지 | 부산 동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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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임정, 중국방면 |
| 자료내용 | 한 흥 교(韓興敎) 1885. 11. 25~1967. 7. 1 號 : 東海, 恨生 이명 : 韓 興, 韓震山
부산 동래(東來)사람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일본 강산(岡山)의학전문학교 졸업후인 1911년 10월에 상해로 망명하여 중국혁명군 구호의장(救護醫長)으로서 소주(蘇州), 진강(鎭江) 등 전선에서 많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1912년에는 북벌혁명군(北伐革命軍) 홍십자회(紅十字會) 대장으로 피명되어 활동하였으며, 항주(杭州) 및 북경(北京)의학전문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재직하였다. 1912년에 상해(上海)에서 신규식(申奎植) 조성환(曺成煥)과 함께 동제사(同濟社) 조직에 참여하고 독립운동자들의 의료를 전담하였으며, 1914년 상해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계속 활동하였다. 이후 일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와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신채호와 함께 중외통신사(中外通信社),전광신보사(展光新報社) 창립에 참여하고 노령(露領), 미주(美洲), 중국 각지에 신문을 발송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25년 6월에는 북경(北京)에서 원세훈(元世勳) 송호(宋虎) 등 동지들과 선두자사(先頭者社)를 조직하고 기관지 "앞잡이"를 발행하는 등 중국국민과 연합하여 항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운동을 벌여, 한 중연합으로 "타도일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5년에는 북경(北京), 천진(天津) 등을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산서성 태원(山西省 太原)에 정착하여 대동병원(大同病院)을 개업한 뒤, 항일운동을 지원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음.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5卷, 國家報勳處, 1988年, pp.821~822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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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봉
| 이름 | 윤경봉(尹敬奉) | 출신지 | 부산 동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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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임정, 중국방면 |
| 자료내용 | 윤 경 봉(尹敬奉) 1897. 1.25~1941.11. 9
부산(釜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29일 부산 동래군 구포(龜浦)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학생인 양봉근(楊奉根)이 고향으로 내려와 구포면서기 임봉래(林鳳來)를 만나 서울과 평양(平壤)의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전함으로 계획되었다. 3월 27, 28일 박영초(朴永初)·이수련(李守蓮) 등의 집에서 임봉래·유기호(柳基護) 등은 회의를 거듭한 끝에, 구포 장날인 3월 29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교대로 밤을 세워가며 독립선언서와 소형 태극기 수백매씩을 제작하였고, 대형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프랑카드를 만들었다. 3월 29일 정오, 그들은 구포장터에서 1,000여 명의 시위군중에게 미리 제작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때 윤경봉은 솔선하여 선두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주도해 갔다. 이어 오후 3시 경, 윤경봉을 비롯한 시위군중 1,200여 명은 구금 인사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로 돌진하였다. 그들은 주먹과 몽둥이로 주재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이렇듯 시위군중의 활동이 적극적으로 변하자, 일경들은 총탄을 쏘며 이들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는 이 일로 피체되어 8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8월을 받고 11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豫審決定書(1919. 7. 19. 釜山地方法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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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명
| 이름 | 차상명 (車相明) | 출신지 | 부산 동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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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임정, 중국방면 |
| 자료내용 | 차 상 명(車相明) 1895. 8. 2~1945. 4. 7
부산(釜山)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범어사(梵魚寺) 학생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서울에서의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이 계획되던 2월 하순경, 불교계의 민족대표인 한용운(韓龍雲)이 이곳에 내려와서 주지 오성월(吳星月) 및 이담해(李湛海) 오이산(吳梨山) 등을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의논하고 상경하였다. 당시 범어사 승려이던 그는 이들과 만나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대하여 전해듣고, 사찰내에 있던 국민학교과정의 명정학교(明正學校)와 중등학교 과정의 지방학림(地方學林) 학생들을 중심으로 3월 18일의 동래읍(東萊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3월 17일 오후, 범어사 경내에서는 40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명성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의 졸업생 송별회가 벌어졌는데, 그는 이 자리에 모인 학생들에게 이튿날로 계획된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고하고, 승려인 김영규(金永奎)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마침 지난 3월 13일의 동래 장날에 동래고보(東萊高普)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있은 직후라서 학생들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그는 4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야음을 이용하여 선리(仙里) 뒷산과 동래 향교 뒷산을 넘어, 이튿날 새벽 1시경, 동래읍 복천동(福泉洞)에 있는 불교 포교당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날이 새기를 기다리던 그는 밀고를 받아 이곳을 기습한 20여명의 일본 군경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17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3卷, 國家報勳處, 1987年, p.771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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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 이름 | 김귀룡 (金貴龍) | 출신지 | 부산 동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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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김 귀 룡(金貴龍) 1898. 6. 25~1975. 11. 26 號 : 石雲
부산(釜山)사람이다. 1919년 3월 13일의 동래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동래고보(東萊高普)의 학생대표로서 3월 7일 부산상업학교(釜山商業學校) 학생대표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고영건(高永建) 엄진영(嚴進永) 등 대표들과 함께 구체적으로 계획을 진행시키던 중, 3월 10일 동래고보 선배로서 경성고등공업학교(京城高等工業學校)에 다니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수학교사 이 환(李環)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상의하고 동래고보 학생의 거의 배후 참모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그는 주동 학생들과 함께 하숙방을 전전하면서 협의한 끝에, 동래읍 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를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 태극기 독립만세기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이에 그는 3월 11일부터 13일에 걸쳐 고영건의 하숙집에서 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5백여매의 독립선언서와 대형독립기, 그리고 수백매의 태극기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독살을 폭로하는 오왕약살(吾王藥殺)이라는 격문도 준비하였다. 3월 13일 오후 2시, 그는 김귀룡등과 함께 동래군청앞 광장에 모인 시위군중에게 인쇄물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점차 장꾼들까지 가담하여 읍내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 광경을 보고 감격한 어떤 조선인 경찰은 제복과 모자를 벗어 던지고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고, 어떤 조선인 헌병보조원도 정복을 벗어 던지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러나 50여명의 일본군과 기마경찰이 출동하여 야만적인 발포를 감행하면서 닥치는대로 체포하였다.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27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음.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3卷, 國家報勳處, 1987年, p.623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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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희
| 이름 | 김윤희 (金允熙) | 출신지 | 부산 동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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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김 윤 희(金允熙) (1889)~1921. 5. 22
부산 동래(東萊) 사람이다. 1919년 동래군 정관면(鼎冠面)에 거주하면서 같은 면의 신두성(辛斗星) 정지모(鄭智模) 등 동지와 더불어 의논하여 오는 4월 9일 장안면(長安面)의 장날을 의거일로 약정하고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4월 9일 장안면 좌천리(佐川里)의 장날 장터에 모인 다수의 군중과 함께 울산(蔚山)으로 통하는 거리까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의 발포로 제지 해산되었으며 이때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해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5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9卷, 國家報勳處, 1991年, pp.95~96.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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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근
| 이름 | 양수근(梁壽根) | 출신지 | 부산 동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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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양 수 근(梁壽根) 1898. 6.27~1977. 2.26
부산(釜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범어사(梵魚寺) 학생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범어사에는 초등학교 과정의 명정학교(明正學校)와 중등학교 과정의 지방학림(地方學林)이 있었는데, 그는 지방학림 학생이었다. 3월 17일 오후, 범어사 경내에서는 40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의 졸업생 송별회가 열렸다. 이때 승려인 김영규(金永奎)의 축사가 끝난 후 40여 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야음을 틈타 선리(仙里) 뒷산과 동래향교 뒷산을 넘어, 이튿날 새벽 1시경 동래읍 복천동(福泉洞)에 있는 불교포교당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곳을 기습한 20여 명의 일경은 김영규·차상명(車相明)·김상기(金相琦) 등 몇 명을 호명하여 경찰서로 연행하여 갔다. 강제해산 당한 학생 40여 명은 다시 의거를 모의하고, 3월 18일 밤, 동래읍 서문(西門) 부근에서부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동래시장을 거쳐 남문(南門)에 이르기까지 만세운동을 하고 해산하였다. 계속하여 19일 오후 5시경, 양수근 등 10여 명의 학생들은 동래시장 남문 부군으로부터 시위를 전개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연이어 고창하면서 동래경찰서로 돌진하였다. 이때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여러 주도 인물들과 함께 검거되었다. 이로 인해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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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덕
| 이름 | 이상덕 (李相悳) | 출신지 | 부산 동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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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이 상 덕(李相悳) 1900. 5. 13~1975. 6. 6
부산(釜山) 사람이다. 그는 동래고보(東來高普) 재학 중 1919년 3월 13일 부산 동래에서 엄진영(嚴進永) 등과 동래고보 학생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동래에서 만세운동의 소식을 접한 것은 3월 2, 3일경 독립선언서가 기독교계열을 통해 부산으로 전해지고, 서울의 학생대표가 부산에 내려오면서 였다. 동래고보에서는 3월 7일부터 만세시위를 계획해 나갔으며, 3월 10일경 동래고보 출신으로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재학하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선언서를 가져오면서 보다 구체화되었다. 이 때 동래고보 4학년 재학 중이던 그는 엄진영 김귀룡(金貴龍) 고영건(高永建) 김인호(金仁鎬) 박득룡(朴得龍) 윤삼동(尹三東) 등 10여 명의 동급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의 계획을 세워 나갔다. 그리하여 이들은 거사일을 3월 13일 동래읍 장날을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에 엄진영의 대한독립만세 선창에 이어 40여 명의 학생과 장꾼들이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이 때 이상덕은 시위행렬의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기마경찰과 일본군에 의해 이상덕을 비롯한 22명의 학생들은 현장에서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19년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3卷, 國家報勳處, 1996年, p.260.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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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호
| 이름 | 허영호 (許永鎬) | 출신지 | 부산 동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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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허 영 호(許永鎬) 1900. 12. 22~납북
부산 동래(東萊) 사람이다. 1919년 동래읍내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범어사(梵魚寺) 학생의거에 참여하였다.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인 한용운(韓龍雲)의 지시를 받아 김법린(金法麟) 김한기(金漢琦)등의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독립선언서 1천 매를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7일 밤 이미 준비된 태극기 1천 매와 격문 및 독립선언서를 숨겨 가지고 동래읍 장터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졸업생 송별회를 마치고 이곳으로 행진해 오던 학생 40여 명과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3월 18일 아침이 되자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격문 수백 매를 작성하여 군중에게 미리 배부하고 오후 5시경 학생과 주민 수십 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후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9卷, 國家報勳處, 1991年, p.524.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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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삼동
| 이름 | 윤삼동(尹三東) | 출신지 | 부산 동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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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윤 삼 동(尹三東) 1901.12. 5~1984. 2.15
부산(釜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13일 동래읍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윤삼동은 당시 동래고보(東萊高普)의 학생 대표로서 3월 7일 부산상업학교(釜山商業學校) 학생 대표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면서 추진되었다. 그는 주도 학생들과 함께 하숙방을 전전하면서 협의한 끝에 동래읍 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를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태극기·독립만세기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이에 그는 3월 11일부터 13일에 걸쳐 고영건의 하숙집에서 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500여 매의 독립선언서와 대형 독립기 그리고 수백 매의 태극기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독살을 폭로하는 '오왕약살(吾王藥殺)'이라는 격문도 준비하였다. 3월 13일 오후 2시, 그는 김귀룡 등과 함께 동래군청 앞 광장에 모인 시위군중에게 인쇄물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점차 장꾼들까지도 가담하여 읍내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러나 50여 명의 일본군과 기마 경찰이 출동하여 야만적인 발포를 하며 닥치는대로 군중을 체포하였다. 그도 이때 피체되었으며, 이해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受刑人名表廢棄目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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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학
| 이름 | 최장학 (崔章學(陳嘉明)) | 출신지 | 부산 동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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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광복군 |
| 자료내용 | 최 장 학(崔章學) 1909. 4. 11~미상 이명 : 陳嘉明
부산 동래(東萊)사람이다. 1927년 부산상업학교 재학 당시, 학생 10여명이 흑조회(黑潮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28년에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1929년 9월 24일에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강서성(江西省) 성자(星子)에 있는 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을 수료하고 중국군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1월에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어 초모공작 활동, 적 정보수집 포로심문등의 공작활동을 전개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1977년에 건국포장을 받았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음.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5卷, 國家報勳處, 1988年, p.1099.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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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원
| 이름 | 김규원 (金圭元) | 출신지 | 부산 동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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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일본방면 |
| 자료내용 | 김 규 원(金圭元) 1925. 1. 8~
부산(釜山) 사람이다. 일본 이기시(尼崎市) 소재 관서학원고등상업학교(關西學院高等商業學校) 1학년 재학 중에 교내에서 일인으로부터 모멸, 차별을 받는 것과 한인의 비참한 생활환경을 목도하며 민족의식을 각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1943년 6월경부터 항일민족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의하고 지식층에 대한 민족의식 고양과 단결을 도모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1943년 6월 초순에는 조선총독부 총무국(總務局) 문서과(文書課)에 근무하던 학우(學友) 서원수(徐元洙)에게 “나는 조선동포 구제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자네도 이에 협력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고, 같은 해 8월 귀국해서는 그를 직접 방문, 독립운동에 진력할 것을 격려하였다. 이 시기에 부산 해운대 철도원으로 재직하고 있던 지우(知友)에게 “조선동포의 구제를 위해 조선청년은 끝까지 노력하자”는 내용의 서신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이기시(尼崎市)에 거주하던 친구에게도 위와 같은 취지의 서신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을 선전하던 중 1943년 10월 28일 병고현(兵庫縣) 천서시(川西市)의 천서항공기회사(川西航空機會社) 작업현장에서 일경에 피체되었다. 1944년 9월 11일 신호(神戶)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1卷, 國家報勳處, 1994年, p.41.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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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인 호
| 이름 | 김 인 호(金仁浩)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김 인 호(金仁浩) 1900. 2. 26~1982. 12. 4
부산(釜山) 사람이다. 조선독립1919년 3월 13일 동래읍(東萊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동래고보(東萊高普)의 학생대표로서 3월 7일 부산상업학교(釜山商業學校) 학생대표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김귀룡(金貴龍) 엄진영(嚴進永) 등 대표들과 함께 구체적으로 계획을 진행시키던 중, 3월 10일 동래고보 선배로서 경성고등공업학교(京城高等工業學校)에 다니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수학교사 이 환(李環)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상의하고 동래고보 학생의거의 배후 참모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그는 주동학생들과 함께 하숙방을 전전하면서 협의한 끝에, 동래읍 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를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 태극기, 그리고 수백 매의 태극기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독살을 폭로하는 오왕약살(吾王藥殺)이라는 격문도 준비하였다. 3월 13일 오후 2시, 그는 김귀룡과 함께 동래군청앞 광장에 모인 시위군중에게 인쇄물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점차 장꾼들까지도 이에 가담하여 읍내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 광경을 보고 감격한 어떤 조선인 경찰은 제복과 모자를 벗어던지고 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그러나 50여명의 일본군과 기마경찰이 출동하여 야만적인 발포를 감행하면서 닥치는대로 시위군중을 체포하였다.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3卷, 國家報勳處, 1987年, pp.642~643.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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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용
| 이름 | 양태용(梁太鎔)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양 태 용(梁太鎔)1893. 2.24~1937.11.15
부산(釜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29일 부산 동래군 구포(龜浦)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학생인 양봉근(楊奉根)이 고향으로 내려와 구포면서기 임봉래(林鳳來)를 만나 서울과 평양(平壤)의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시작되었다. 3월 27, 28일 박영초(朴永初)·이수련(李守蓮) 등의 집에서 동지들이 회의를 거듭한 끝에, 구포 장날인 3월 29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독립선언서와 소형 태극기 수백매씩을 제작하였고, 대형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프랑카드를 만들었다. 3월 29일 정오, 그들은 구포장터에서 1,000여 명의 시위군중에게 미리 제작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때 양태용은 솔선하여 선두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주도해 갔다. 계속하여 오후 3시 경, 양태용을 비롯한 시위군중 1,200여 명은 더욱 기세를 높이며, 주재소로 돌진하였다. 그들은 주먹과 몽둥이로 주재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또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이렇듯 시위군중의 활동이 적극적으로 변하자, 일경들은 총탄을 쏘며 이들을 해산시켰다. 양태용은 이 일로 8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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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언
| 이름 | 정성언 (鄭聖彦)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정 성 언(鄭聖彦) 1892. 7. 7~1952. 2. 3
부산(釜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17일 부산 동래군(東萊郡) 범어사(梵魚寺)에서 개최된 명정학교(明正學校)와 지방학림(地方學林) 졸업생 환송회 석상에서 학생들을 규합, 거사를 굳게 다짐하고 송별회가 끝난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동래읍(東萊邑)으로 행진하다가 일군헌병이 갑자기 들이닥쳐 시위가 해산되었다. 이튿날 18일 밤 다시 시위를 전개하여 동래읍 서문부근에서부터 동래 장터를 향하여 시위행진하였고 19일에도 수십 명의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17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1卷, 國家報勳處, 1994年, p.267.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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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치옥
| 이름 | 허치옥 (許致玉)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허 치 옥(許致玉) 1894. 10. 27~1924. 9. 6
부산 동래(東萊) 사람이다. 구포면(龜浦面) 구포리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9일 경성의학전문학교생(京城醫學專門學校生)인 양태근(楊泰根)이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이곳 면서기 임봉래(林鳳來)를 만나 서울의 3.1독립운동 실황을 상세하게 전하고 계속해서 김옥겸(金玉兼) 유기호(柳基護) 등과 거사하기로 결정하여 태극기 수백 매를 밤을 새워가며 준비하였다. 그는 이날 1,2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구금된 동지들의 석방을 외치며 주재소로 돌진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후 8월 7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1년 4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9卷, 國家報勳處, 1991年, p.525.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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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수
| 이름 | 김달수 (金達洙(金達銖)(金達守))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김 달 수(金達洙) 1888. 11. 27~1924. 12. 3 이명 : 達銖達守
부산(釜山) 사람이다. 1919년3월 29일 부산 동래(東來) 구포(龜浦) 시장에서 면민 1천 2백여 명의 군중을 지휘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구포는 낙동강 좌안에 위치하여 부산 김해 양산 동래에 접한 요충지대로써 고래로부터 상업이 번창한 곳이었다. 이곳에서의 만세운동은 부산과 동래의 만세소식을 접하면서 시작되었고, 3월 중순 경성의학전문학교 생도인 양봉근(楊奉根)이 구포로 내려오면서 구체화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구포 장날인 3월 29일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정하고, 3월 27일과 28일에는 거사에 필요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밤을 세워 인쇄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날 이들은 구포시장에서 장꾼 1천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런데 이 때 11명의 인사가 일경에 붙잡히게 되자, 김달수 등 젊은 청년은 붙잡힌 인사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금 대오를 정비하여 1천 2백여 명의 군중을 지휘하면서 주재소로 돌진하였다. 주재소를 돌진한 청년들은 주재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의자와 책상 등 집기를 부수면서 구금된 인사들을 구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무자비한 총격에 의하여 수많은 인사들이 다치고, 김달수는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19년 7월 1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2卷, 國家報勳處, 1996年, pp.182~183.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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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갑
| 이름 | 문인갑 (文仁甲)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 자료내용 | 문 인 갑(文仁甲) 1923. 7. 11~ 號 : 谷巖
부산 동래(東萊)사람이다. 동래중학교 재학중 1941년 겨울에 항일학생조직인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 결성에 참가하여 당원으로 활약하였다. 조선독립당은 동래중학생 김일규(金一圭) 양중모(梁仲模) 등이 앞서 1940년에 조직하였던 독서회를 강화, 개편한 것으로서 당원들은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였다. 1942년 봄에 이들은 남기명(南基明)의 집에서 2차회합을 갖고 강령을 정하는 한편 항일투쟁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세우며 본격적인 활동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때 그는 행동반으로서 농민지도 및 국내조사 등의 일을 맡았다. 그후 당원들은 여러차례 비밀회합을 거듭하면서 행동방략을 협의하다가, 1943년 졸업과 동시에 실제행동을 개시하였으며 당원간의 연락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암호를 취하도록 하였다. 1944년 8월 1일에 동당원들은 양중모의 집에 모여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 분석하고 군사기밀 탐지 일군탄약고 폭파 군용열차 통과시 구포(龜浦)다리 폭파 계획등을 세웠다. 그리고 만약 거사가 실패할 경우에는 일군에 입대한 후 연합군 진영으로 탈출하여 중국에서 다시 만난다는 대비책도 세워 놓았다. 한편 조선독립당은 항일결사 자일회(紫一會) 순국당(殉國黨) 등과도 연락을 통하면서 항일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자 했다. 특히 순국당은 1944년 5월 결성때부터 조선독립당원 이관수(李觀洙)가 그 조직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조선독립당과 행동내용, 조직 등이 거의 같았을 뿐 아니라 조선독립당의 세포당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 1944년 7월에 순국당의 조직이 일경에 탄로나게 되어 동년 8월에 조선독립당의 조직도 발각되었으며 이로인하여 그도 당원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었다. 피체후 그는 미결수로 부산형무소에서 1년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음.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6卷, 國家報勳處, 1988年, pp.307~308.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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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직
| 이름 | 김규직 (金圭直)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학생운동 |
| 자료내용 | 국가보훈처의 국가공훈록이 작성되지 않았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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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기
| 이름 | 김한기 (金漢琦(金末鍾))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김 한 기(金漢琦) 1897. 12. 27~1982. 3. 25 이명 : 末鍾 正友
부산 동래(東萊)사람이다.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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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병영
| 이름 | 엄병영 (嚴棅永(嚴秉永)(嚴正友))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엄 병 영(嚴棅永) 1902. 6. 8~1974. 12. 15 이명 : 秉永 正友
부산(釜山) 사람이다.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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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조
| 이름 | 임명조 (林命祚)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임 명 조(林命祚) 1905. 2. 9~1965. 10. 27
부산 동래(東萊)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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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봉
| 이름 | 박성봉(朴成鳳)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2003) | 운동계열 | 독립만세운동 |
| 자료내용 | 박 성 봉(朴成鳳)1898. 1.24~1980. 2. 6
부산 동래(東萊)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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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엽
| 이름 | 김도엽 (金度燁)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김 도 엽(金度燁) 1899. 7. 29~1937. 10. 6
부산 동래(東萊)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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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현
| 이름 | 박세현 (朴世鉉)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 자료내용 | 박 세 현(朴世鉉) 1897. 3. 6. ~ 1918. 8. 21.
부산(釜山)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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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 이름 | 김기삼 (金琪三)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김 기 삼(金琪三) 1901. 2. 5~1965. 3. 27
부산 동래(東萊)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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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시환
| 이름 | 문시환 (文時煥)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애족장 (1995) | 운동계열 | 임정 중국방면 |
| 자료내용 | 문 시 환(文時煥) 1899. 8. 12~1973. 10. 11
부산(釜山) 사람이다.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편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자, 경남기성회(慶南期成會) 대표로 동 회의에 참가하여 노동위원(勞動委員)으로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를 확대 개조하려는 안창호(安昌浩) 계열의 개조파(改造派) 간부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방략과 독립운동단체의 통일기관을 조직하기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의 결말이 흐지부지 끝나게 되자, 상해에서 보천교청년회(普天敎靑年會) 대표 강홍렬(姜弘烈) 등 개조파 지지자들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6월말 의열단 총회에서 일제의 중요기관 폭파 및 요인 암살 등의 거사를 대대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결의하자, 그는 군자금 모집요원으로 국내로 밀파되어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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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진영
| 이름 | 엄진영 (嚴進永)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엄 진 영(嚴進永) 1899. 3. 30~1947. 6. 26
부산(釜山)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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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찬
| 이름 | 정인찬 (鄭寅贊)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임정 중국방면 |
| 자료내용 | 정 인 찬(鄭寅贊) 1887. 12. 27~1932. 7. 9
부산 동래(東萊)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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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소운
| 이름 | 어소운(魚小雲)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항일투쟁 |
| 자료내용 | 어소운(魚小雲 1906.12.30~1977.10.28
부산 동래(東萊)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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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수
| 이름 | 김반수 (金班守)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김 반 수(金班守) 1904. 9. 19~
부산 동래(東萊) 사람이다.
-출신지: 부산 동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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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준
| 이름 | 박영준 (朴英俊)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3/1운동 |
| 자료내용 | 박 영 준(朴英俊) 1885. 4. 25~1943. 8. 19 巖
부산 동래(東來)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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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
| 이름 | 김법린 (金法麟)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 자료내용 | 김법린(金法麟) 1899. 8. 23~1964. 3. 14 이명:법윤(法允)
부산(釜山)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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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출
| 이름 | 박영출 (朴英出) | 출신지 | 부산 동래 |
|---|---|---|---|
| 훈격 | 대통령표창 (1992)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 자료내용 | 박 영 출(朴英出) 1908. 3. 25~1928. 8. 2
부산 동래(東萊)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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