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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삼성대와 어린 김장군

뛰어난 명승지도 이름난 고적(古蹟)도 아니다. 지금은 아스팔트 포장도로와 주택들 아래에 깔려버린 옛 동래의 한 지명일 뿐이다. 동래교차로에서 대동병원 맞은편 일대는 원래 삼성대(三姓臺)였다. 바로 이곳이 동래 어린 김장군(金將軍)이 신병(神兵)을 모아 훈련시켰던 곳이기도 하다.
삼성대란 이름의 유래는 꽤나 오래된 것 같다. 《동래부지(東萊府誌)》고적조(古蹟條)에 보면 안(安), 송(宋), 옥(玉)씨 등 세 성의 시조가 살았던 곳이라고 기록한다.
어린 김장군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선조 9년(1576) 객달리(客達里:현재의 명륜동)에 한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나이 오십에 가깝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어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부인은 난데없이 용 한 마리가 품에 안겨드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 가 부인에게 태기가 있었다. 집안엔 생기가 돌았다. 꿈결같은 생활이 삼개월쯤 지났을까. 뜻하지 않게 남편이 죽어버렸다.
그로부터 일곱 달이 지나고 부인은 유복자를 순산했다. 사내아이였다. 용모나 골격이 준수한 게 첫 눈에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모친이 깊이 잠든 한밤중만 되면 살짝 집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집을 나가서는 곧장 집 서쪽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는 나지막한 봉우리에 올라 주문을 외워 신병들을 모았다. 한 시간쯤 신병들을 훈련시킨 뒤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모친 곁에 눕는 것이었다. 하루는 모친이 잠을 깨어보니 자고 있어야 할 아이가 없었다. 놀라 찾아 나서려는데 마침 아이가 방안으로 들어오기에 어디 갔더냐고 물었다. 그랬더니「뒷간에 갔다 옵니다.」며 잠자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제 서너 살 먹은 아이가 혼자 뒷간에 갔다 온다는 말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아이의 행동을 수상하게 생각한 모친은 하룻저녁 수잠을 자며 아이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한밤중이 되니 아이는 일어나 집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몰래 아들의 뒤를 따라가서 숨어 살펴보니 삼성대서 신병을 모아 놓고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모친의 놀라움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급히 집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다가, 돌아온 아들에게 오늘밤 일을 말했더니 아이는 아무 걱정 말라며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친의 입에서 그 사실이 새어 나와 마침내 사람들 사이에는 동래에 장군이 났다는 소문이 퍼지고 말았다. 그 동안 아이의 나이도 일곱 살이 되었다.
그 해 동래부에서는 관아건물을 짓는 역사(役事)가 벌어졌다.
그래서 산성 사십골(현재 부산대학 뒤편 깊숙한 골짜기) 안에 대들보에 쓸 재목을 베어 두었는데 얼마나 컸던지 옮기지를 못하여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하루는 비가 몹시 쏟아졌다. 비가 갠 이튿날 아침, 공사장에 나갔던 동래 사람들은 놀랐다. 걱정했던 대들보 재목이 마당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 괴이하게 여기고 있던 차에 현장에 육칠세되는 아이의 나막신 발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 아이가 한 짓임을 알아차렸다. 관가에서도 이 소문을 듣고 사실여부를 조사한 결과 대들보를 옮긴 사람이 객달리 김씨의 어린 아들임을 밝혀내고 나라에 상소를 올렸다. 이 아이의 신출귀몰한 재주에 대해 소상히 들은 조정에서는 장차 역모를 꾀할 아이라 하며 죽일 것을 결정했다.
한양으로 잡혀간 아이는 매일 밤이면 동래 모친 곁에 와서 놀다가 새벽녘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루는 아이가 모친 곁에 와서 물었다.「어머님, 내일은 나라에서 죄없는 저를 처형할 것인데 어머님께서 저더러 죽지 말라 하시면 죽지 않겠습니다.」「얘야, 네가 죽지 않으면 역적으로 몰리어 우리 삼족이 멸하는 화를 당할 것이니 이 일을 어찌 하면 좋겠느냐?」모자는 눈물로써 마지막 작별을 했다.
과연 이튿날 아이를 처형하라는 어명이 내렸다. 그런데 아무리 칼로 내리쳐도 죽지를 않았다. 하다 못해 형리가「너는 어찌해서 죽지 않느냐?」고 물으니 아이는「나에게 김장군이란 칭호를 내려 현판을 만들어 주면 죽겠다.」는 대답이었다. 김장군 칭호를 하사하였더니 아이가 통곡하며「소인이 죽고나서 십년 후면 상감께서 소인을 생각하시리라.」(이것은 선조 25년 임진왜란을 예언한 말이다.)고 말한 뒤 양 겨드랑이에 난 날개를 걷고 매를 세 번씩 치라고 일러주었다.
아이가 죽자 중신들은 어린 아이에게 장군칭호는 부당하다고 주장, 현판을 치웠더니 시신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시 현판을 걸고 시신을 치운 다음 그 현판을 끝내 없애 버리고 말았다.
그 뒤 동네 사람들은 어린 김장군의 가엾은 넋을 위로하고 제사를 지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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