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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의 관왕묘

지금 동래구 명륜동 447번지의 관왕묘가 있었던 자리는 김장군이라는 아기 장수가 태어난 집터였다. 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일어서고 천장에도 달라붙기도 하는 신동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김해의 송장군은 이곳에 찾아와서 어린이의 골상을 보니 장래 비범한 사람이 될 것으로 보이기에 다가올 앞날을 두려워하여 즉석에서 이 아이를 죽였다.
이 때부터 이 자리에는 저녁만 되면 천병만마(千兵萬馬)가 달리는 말굽 소리와 함께 군신들이 다투는 함성이 소란하여 부득이 공터로 방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부사 박제관이 동래에 부임하여 관왕묘를 세웠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고 한다. 즉 박기체라고 부르는 동래 사람이 부산의 김모씨 집에 놀러 갔더니 관왕의 영정에 관우 신장의 위패를 세워놓고 무엇인가 빌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박씨는 이상히 여겨,「노형은 어찌하여 관왕의 영정에 관우의 위패를 세워놓고 무엇을 그렇게도 공손히 빌고 있는 거요?」라고 물으니「이 신장은 관운장(關雲將)이온데 무엇이든 빌기만 하면 효험이 나타나기에 제가 이렇게 모시는 거요.」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박씨는「노형! 이 영정을 내게 주신다면 노형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은 물론이요, 제가 성의껏 신장을 모시겠소.」라고 애걸한 끝에 관왕의 초상화를 얻게 되었다.
이 무렵 동래부사 박제관은 이 말을 전해 듣고 이상하게 여기고 있던 차에 하룻밤 꿈속에서 관운장을 만났는데 관우가,
「부사! 나는 지금 고독하게 묻혀 있으니 넓은 자리로 옮기게 해주오.」라고 청하는 말을 들었다. 꿈에서 깨어난 부사는 너무나 신기했기 때문에 해몽 끝에 김장군이 죽은 집터에 관왕묘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몇 해 후 동래부사로 있던 황정연이 논 열 마지기와 재실 다섯 칸을 지어 영년(永年) 유지책을 강구해 주었다. 1970년대에 와서 이 일대가 개인소유로 넘어가 김장군의 사당과 함께 관왕묘가 철거되었다.

이 밖에도 동래 관왕묘에 대하여는 한두 가지 다른 전설이 있으니 아울러 적어 두겠다. 즉, 하나는 중국 촉(蜀)나라 장수 관우가 여몽(呂蒙)에게 죽었으므로 그 원한으로 "여(呂)"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자기 영(影)이 있는 근처에 오기만 하면 죽였다는 전설에 따라서 "여"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그 묘안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를 돕기 위해서 명의 군사들이 와서 싸울 때, 관운장이 신병을 거느리고 우리의 국난을 도와주었다는데 연유하여 그 당시 명나라의 조정은 은 4천냥을 내어 우리 나라 여러 곳에 관왕묘를 세우게 했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우리 조정과 의논해서 서울의 남관왕묘는 명나라 장수였던 양호와 만세덕이 지었고, 청주에는 명나라 장수 모국기, 그리고 명의 도독 유정은 남한 각지에 많은 관왕묘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동래에 세워진 이 관왕묘는 우리 손으로 지은 것이라는 게 동래 고로(古老)들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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