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향토를 빛낸 인물

발명가 장영실

장영실(蔣英實)은 1441년(세종 23)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測雨器)와 수표(水標)를 발명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제작한 사람이다.
또한 천체 관측기구인 대간의(大簡儀), 소간의(小簡儀)를 비롯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를 제작하여 15세기에 있어서 경복궁(景福宮)의 간의대(簡儀臺)를 세계 최대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천문관측시설의 하나로 올려 놓았다.
뿐만 아니라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와 천평일구(天平日晷), 그리고 표준 해시계인 정남일구(定南日晷) 및 공중(公衆) 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비롯하여 주야 겸용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의 정밀한 해시계와 앞서 언급한 자격루(自擊漏)의 일종인 흠경각(欽敬閣)의 옥루(玉漏) 등 물시계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당시 사용되던 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의 결함을 발견하고 이를 보완하여 금속활자인 갑인자(甲寅字)의 주조를 지휘·감독하였고, 경상도의 채방별감(採訪別監)이 되어 도내(道內) 각 고을의 동과 철의 채광 및 제련에도 관여했다.
이처럼 장영실은 수많은 과학기기를 발명·제작하여 조선시대 우리의 과학문명을 반석 위에 올려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발명은 당시 세계사적으로도 가장 선진(先進)의 업적을 이룩한 것이었다.
이 장영실이 바로 동래 사람으로 그는 본시 동래현의 관노(官奴)였으며, 기생의 소생이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천한 계급의 출신이기에 그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기록은 전무하다. 장영실에 관한 기록은《세종실록(世宗實錄)》과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등에서 나타나지만 그의 생년과 사망 시기를 알지 못한다.
단지 1423년(세종 5)에 상의원 별좌(尙衣院 別坐)로 관직을 갖게 된 것이 기록상의 처음이며, 1442년(세종 24)에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왕의 가마가 오래가지 못하고 부서져 그는 이 사건으로 장(杖) 80도의 중형을 받고 파직된 것이 마지막일 뿐이다.
장영실이 동래 사람이란 것은 그의 출신이 동래현 관노라는 것 외에도 그의 성장도 역시 동래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대체로 노예출신의 관직 임용이 어려웠던 시기에 관직으로 발탁은 남다른 노력과 공로가 탁월했기 때문이다.
장영실은 언제 서울로 올라갔는지도 사료상 불분명하나, 그의 과학적 창조력과 뛰어난 재주를 관장(官長)이 알고 천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동래부 선생안(東來府先生案)에는 유감스럽게도 조선초기의 태조 때부터 연산군 말기까지의 114년간이 빠져버려 그의 천거자 또한 알 수가 없다. 조선초기 동래현의 수령(守令)은 무관(武官)으로 병마사 겸 판현사를 두었는데 그들 무인 목민관(武人 牧民官)에 의해 병기의 수리와 화포의 제작기술이 뛰어난 장영실의 발탁이 용이했으리라 짐작된다. 장영실의 과학기기 발명·제작에는 항시 그의 책임 상관으로 함께 일한 이천인 그도 역시 무관임이 주목된다.
장영실의 기록상 마지막 해인 세종 24년은 그가 관직에 오른지 19년째이며, 이 시기는 세종이 화포공장(火砲工匠) 장려의 대책을 세워 화포를 주조하고, 《총통등록(銃筒謄錄)》을 지어 각 도로 나누어 주는 상황으로 장영실의 활약이 요구되는 때임에도 다시 임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때가 벌써 노년이거나 사망의 시기로 짐작된다. 따라서 그의 관리로서의 생활은 막연히 40세에 가까운 나이로 짐작해 볼 수 있으며, 20세 전까지의 생활은 동래가 중심이 되었다고 본다.
동래가 낳은 위대한 발명가이자 천문학자인 장영실은 세종의 덕치민본정신(德治民本精神)과 어울려 높은 과학정신을 구축하였다고 보아진다. 그가 만든 측우기나 수표는 강우량과 하천 수위 측정 기구이며, 대소간의(大小簡儀), 규표(圭表)는 천체와 태양의 관측기기로 모두 농업국가인 우리 나라에서 천문과 기상관측의 민생과 직결되는 것으로서 그의 과학에는 민생 복리라는 이념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과학자로서의 말로(末路)는 행복하지 못하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는 활자주조를 위해 상의원 별좌를 시작으로 천문의를 만든 공으로 호군(護軍)에 올랐으며, 측우기 발명의 공로로 정삼품 상호군(正三品 上護軍)으로 특진되었으나,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왕의 가마가 부서져 불경죄로 의금부에 투옥되어 장백도(杖百度)의 형을 받았다가 왕명으로 80도로 감형되었으나, 다시 관직이 복구되지 못한 채 죽었다. 꾸밈없는 성품과 과학적 진리만을 위하여 있는 재주를 총동원하여 발명으로 지금까지 빈번히 우리 나라를 괴롭힌 왜구를 막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어느 의미에 보면 그가 있었기에 세종의 위대한 성업이 이룩될 수 있었다 해도 지나친 찬사는 아닐 것이다.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조그만 직무에도 온몸을 바쳤고, 그 결과 사기(史記) 몇 장에 이름을 날린 그 어느 사람보다도 더 훌륭한 일을 해낸 동래인이었다.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 및 변경 금지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담당부서 정보

  • 담당부서 문화관광과
  • 담당자 이정형
  • 문의전화 051-550-4081

콘텐츠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어느 정도 만족하셨습니까?

만족도 조사

방문자 통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