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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선정

절조의 인물 이춘원

부산의 해운대, 태종대, 몰운대, 겸호대, 동대(東臺), 온정(溫井), 정과정(鄭瓜亭) 등 여러 명승과 고적이 이름을 떨쳤거나 떨치고 있는 것은 그 자체의 경관이 수려함도 있으나, 이를 가꾸고 완상(玩賞)함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들 명승을 낱낱이 탐방, 제목을 붙여 시를 지어 널리 알린 이로는 선조 때의 동래부사 이춘원(李春元)을 빠뜨릴 수가 없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동래 지방은 15년 동안 17인의 수령(守令)과 2인의 판관(判官)이 교체되어 평균 재임기간이 1년도 못되는 형편이었으며, 임진왜란의 피해로 도탄에 빠져 있었다. 이러했던 동래가 대체로 평정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이춘원 부사 시절부터였다.
이부사는 1607년(선조 40년) 7월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1608년 2월까지 동래 부산의 곳곳을 답사하여 백성들을 위무하고 그 본 것을 시(詩)로 적어 문풍(文風)을 일으켰다. 그의 시는 인빈헌의 내주신영(寅賓軒萊州新詠)으로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이춘원 부사는 함평(咸平) 이씨로 1571년(선조 4년)에 태어나 1624년(인조 2년)에 돌아갔으며, 문신(文臣)으로 절개가 남달리 뛰어났다.
초명(初名)은 신원(信元)이고, 초자(初字)는 입지(立之)였는데, 뒤에 이름을 춘원(春元)으로 고치고, 자(字)도 원길(元吉)로 바꾸었으며, 호는 구원(九元)이다.
일찍이 남양(南陽)의 홍지성(洪至誠)에게 글을 배우고, 사암(思岩) 박순(朴淳)의 문인이 되어 어려서 부터 학문에 두각을 나타냈다. 1590년(선조 23년) 20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넷째로 합격했고, 26세인 1596년(선조 29년) 정시문과(廷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권지 부정자(承文院 權知副正字)에 보직되고, 이듬해 정유재란 때 광양(光陽)현감으로 남원싸움에서 왜적과 싸워 위기에 빠진 우리 군사들을 구원하기도 했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613년(광해군 5년)에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을 때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반대, 항론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복직되어 병조참의를 거쳐 가선대부의 위계에 올랐으며, 간신들에게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1617년(광해군 9년) 충청관찰사로 재직중 대북파(大北派) 일당들이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려 들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파직 당했다. 1620년(광해군 12년)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로 등용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1623년 인조가 반정(反正)하여 구신(舊臣)들을 등용할 때 그에게 한직을 맡기려 했으나, 사양하고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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