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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역사관

동래읍성역사관

동래읍성역사관 이미지
동래읍성역사관에 대한 소재지, 이용시간, 연락처, 휴관일을 나타낸 표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역사관길 18(복천동, 복천박물관 100m 옆)
이용시간 09:00 ~ 18:00 (관람료 무료)
연락처 (051) 550-6634
휴관일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 날), 1월 1일, 구청장이 정하는 휴관일

태그 이미지동래읍성역사관, 동래읍성, 정언섭, 성벽, 송상현, 문화재, 동래읍성지

기본정보

동래구에서는 지난 40~50년 동안 무허가 건물, 경작지 등으로 방치되어온 동래사적 공원 내 동래읍성지 문화재 보호 구역을 정비하고 그 자리에「동래읍성 역사관」을 건립하여 동래 읍성의 모형, 동영상, 각종 유물 등을 전시하고 2007년 3월 개관을 하였습니다.
또한 역사관 마당에는 투호·제기차기·윷놀이 등 민속놀이체험 장비를 마련해 놓았으며, 북문광장에는 야외공연장(2,591㎡), 다목적 광장(2,330㎡) 산책로 456m 등의 시설을 갖추고 주민의 여가장소와 학생들의 견학·소풍 등 야외교육장으로 활용하도록 하였으니 많이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동래읍성의 역사

옛 동래읍성은 1021년(고려 현종 12)에 왜구의 노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해안지역인 현재의 부산지방병무청을 중심으로 수영구 망미동 일대에 고쳐 쌓았던 성이다. 고려 말 왜구들의 침입이 심해지자 동래읍성은 1387년에 현재의 동래시장 일대로 옮겨진 후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격전지이자, 패전지가 되었지만 이 성을 방패삼아 항전하였던 유서 깊은 곳으로 1731년에는 이전보다 휠씬 크게 쌓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철거되었고, 그나마 동쪽부터 북쪽의 산등성이에는 성의 일부분이 원형 그대로 남아 전해 오다가 1979년부터 부분적으로 복원되고 있다.

조선전기의 동래읍성 전경 『동래부순절도』 부분도 변박(卞璞)
1760년, 육군박물관 소장

조선전기의 동래읍성
임진년(1592) 4월 15일 동래읍성 전투 장면을 상세하게 그린 동래읍성 부분이다. 당시 조선군과 왜군의 치열했던 교전 상황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성곽 일부가 과장되어 그려져 있지만 1731 년(영조 7) 증축 이전의 조선전기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고려말 1387년(우왕 13) 왜구가 빈번하게 출몰하자 고읍성에서 옮겨 지금의 장소에 박위가 읍성민들과 함께 한달 이상 걸려 쌓은 성이다. 둘레가 3,090척(약 657m), 높이가 13척(약 3.9m)으로현재 읍성 규모의 약 1/6에 해당된다. 성내에는 우물이 6곳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척(周尺) : 둘레 1척 = 21.27cm 영조척 (營造尺) : 높이 1척 = 30.65cm

조선후기의 동래읍성 전경 『경상도지도 중 동래부』 부분도
1872년(고종 9), 서울대 규장각 소장

조선후기의 동래읍성
1872년 제작된 경상도지도 동래부지도 중 읍성부분이 다. 동래성은 1731년(영조7)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 이 성을 과거보다 훨씬 크게 쌓았다. 둘레가 17,291척(약 3.8km), 높이가 17척( 약 5.1m)였다. 1870년(고종 7)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벽과 문루 등을 고쳐 쌓았다. 특히 서장대를 세워 장수의 지휘와 주변 경계를 강화 하였다. 이 지도에서는 왜적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공격을 막을 수 있는 30여 곳의 치성과 보루가 성벽위에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남문에는 세병문과 주조문을 그려 익성(이중문)의 형태를 잘 보여주며, 동·서·북문 등에는 옹성의 모습을 상세하게 그렸다. 성안에는 객사와 동헌,동래장터의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

주척(周尺) : 둘레 1척 = 21.79cm 영조척 (營造尺) : 높이 1척 = 30.65cm

19세기 동래읍성 안의 가옥 전경 『부산동래고지도』 부분도
19세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9세기 동래읍성 안의 가옥
119세기 제작된 동래부지도의 동래읍성 부분으로 다른 지도와는 달리 동래읍성안에 민간가옥들이 상세히 그려져 있으며, 동래읍성에서 개울이 온천천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성내에는 우물이 10곳, 못이 1곳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동래읍성의 중앙에 관청들이 위치하였고, 그 주변에 가옥들이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었다. 성 밖 마을에도 가옥들이 그려져 있으 며, 동래읍성으로으로부터의 거리도 적혀 있다. 성 앞의 농주산에는 조선시대 충렬사가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산을 허물고 동래경찰서가 들어섰다. 일제 강점기 행해진 도시계획사업으로 성벽과 성문이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는 도로가 개설되고 주택지로 변했다.

형태와 축성법

동래읍성의 형태

1731년에 축성한 동래읍성의 둘레는 17,291척(약 3.8km), 높이는 17척(약 5.1m)이다. 읍성안에 우물 10개와 못 1개가 있었다. 자연 지형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의 평산성이며, 북쪽과 동쪽은 산으로 둘러 싸이고, 남쪽과 서쪽은 열려 있고 정면인 남문이 가장 중요한 출입문이다. 문은 남문을 비롯해 서문, 암문, 북문, 인생문, 동문의 6개가 있었다.

조선후기의 동래읍성의 축성법

직사각형의 돌을 이용한 외벽축조 외벽축조상태

성벽 단면 성벽 단면상태

성 외벽 체성 토층 성 외벽 체성 토층

성벽외부
직사각형의 돌을 이용하여 밑에는 큰 돌로 쌓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로 쌓았다. 조선후기 가공 기술의 발달로 수직에 가깝게 쌓았다.

지형에 따른 구축 서장대에서 북문 사이 성벽

산지
산지쪽의 성은 바깥쪽만 돌로 쌓고 그 안쪽은 지형에 따라 흙을 조금 파내고 잡석이나 판축 흙다짐으로 채워 놓았다.

인물

송상현 상

송상현 (宋象賢) 1551년 (명종 6) ~ 1592년 (선조 25) 송상현은 1576년(선조 9) 별시 문과에 급제(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이 동래읍성으로 밀어닥치면서 커다란 나무판에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달라.” 는 글을 써서 세우자, 송상현 부사는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고 나무판에 써서 적에게 던지고 대항하여 끝까지 싸울 뜻을 분명히 하였다. 군사의 수가 턱없이 적어 성이 함락 당하자, 관복(官服)으로 갈아 입고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한 후 단정히 꿇어 앉아 죽임을 당하였다.적의 장수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와 소오 요시또시(宗義智)등이 그의 충절을 기려 성문 밖에 장사를 지내 주었다.

동영상 및 사진자료

송상현 상

동영상 나래이션
안녕하세요. 이제부터 동래구의 귀중한 문화재인 동래읍성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읍성은 무엇을 하기 위해 쌓았을까요? 평상시는 행정을 보는 관청과 사람들을 보호하고, 유사시에는 적과 싸우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어요.
먼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을 살펴보면,옛모습이 가장 잘 남아있는 전라도의 낙안읍성 그리고 고창읍성, 천주교의 순교지로 유명한 충청도의 해미읍성,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던 진주성과 홍주읍성 그리고, 오늘 소개할 동래읍성이 있습니다.

그럼먼저 동래읍성의 역사를 살펴볼까요. 동국여지승람의 읍성조를 보면 원수 박위가 1387년 고려우왕13년에 현재의 동래의 시장과 그 주변에 읍성을 쌓았다고 나와있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동래읍성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되어 부분적으로 고쳐지다가 1731년 영조7년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읍성의 중요성을 알고 이전보다 훨신 크게 고쳐 쌓았다고 합니다.
그럼 동래부사 정언섭은 당시 읍성을 어떻게 쌓았을까요? 먼저 평지 쪽은 성벽이 들어설 부분만큼 파서 잔돌 황갈색 마사토와 진흙을 잘 다져 깔고 다듬은 직사각형의 돌을 밑에서부터 차례로 양쪽에 놓고 그 안쪽은 여러가지 돌로 채워넣었습니다. 그리고 성벽 위에는 몸을 숨기며 침입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여장을 만들고 성문을 중심으로 누각과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만들었습니다 산지쪽의 성은 바같쪽만 돌로 쌓고 그 안쪽은 돌을 채우거나 흙다짐을 해서 쌓았다고 합니다.
자 그럼 동래읍성을 한번 둘러 볼까요.
동래읍성은 성벽을 따라 남문, 서문, 암문, 서장대, 북문, 북장대, 인생문, 동장대, 동문 등이 있고 성 안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 등을 모시고 있는 객사와 동래부사가 업무를 보던 동래부동헌, 장관청, 군관청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건물과 성벽이 일제 강점기에 뜯겨져 아쉬움을 더하는데 현재 복원작업이 한창 진행중입니다. 일부 기초가 남아있는 북문, 동장대, 북장대, 서장대를 중심으로 복원하였고 2005년에 인생문과 주변 성벽을 복원한후 2006년에 이역사관도 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래읍성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곳이 임진왜란 초기 최대 격전지였고 동래부사 송상현을 비롯한 민관군이 장렬한 전투를 벌이다 순절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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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문화시설사업소
  • 담당자 김재란
  • 문의전화 051-550-6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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