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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색을 하면서〈241〉
작 성 자 등록일 2016-10-04 조   회 323

지난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집에서 뭉그적거리다가 난생 처음 염색이란 걸 했다. 제 손으로 제 머리를 염색하던 마누라가 염색약이 남았는데 버리기 아깝다고 나더러도 해보라는 거다.

 

염색이란 걸 해 본 적도, 해 볼 생각도 먹어 본 적이 없던 터라 처음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다 거듭된 아내의 꼬드김에 넘어가 얼떨결에 "그럼 어디 한번 해볼까"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누군들 안 그랬겠나만, 이래봬도 젊어서는 새카맣게 머리숱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던 몸이다. 그랬는데 쉰 나이에 접어들고서는 뒤통수 쪽이 성글어지고 급속히 머리가 세기 시작해선 지금은 아예 반백이 돼버렸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 드는 대로, 머리가 희어지면 희어지는 대로 사는 게 순리가 아니겠느냐고 그대로 놔두었던 터다.

 

실토하자면 염색을 해보기로 한 것은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 꼴로 강의에 나설 거냐"는 아내의 핀잔에 약간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닐보자기를 둘러쓰고 동글 의자에 앉아 마누라의 빗질에 머리를 맡기고 앉아 있자니 내가 어느새 이렇게 됐나 싶어 처량한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염색약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머리를 감고 거울을 마주보는데 기분이 묘했다. 이마의 주름살은 그대론데 머리만 새까만 꼴이 어째 어울리지 않은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론 조금은 젊어진 느낌이 들기도 했다.

 

평소에 젊은 사람들이 노랗게, 빨갛게 염색하고 다니는 걸 그다지 좋게 보진 않았던 터인데, 내가 염색을 해보고 나니 젊은이들이 외모에 신경 쓰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까맣게 염색한 머리를 들여다보며 나와 아내는 서로 피식 웃었다. 이런 농담도 건넸다. "늙어서 부부 한쪽이 먼저 가면 등 긁어 줄 사람이 없어서 서럽다더니 우리도 이제 서로 머리 물들여 주는 나이가 됐네.“

 

언젠가 어느 신문에서 읽은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와 배우 윤정희 씨의 인터뷰 기사가 떠오른다. 백 씨는 윤 씨의 머리카락을 직접 잘라주고, 윤 씨는 백 씨의 머리칼을 염색해 주고 남은 것으로 자기도 염색한다는 거다.

 

휴대폰 하나를 부부가 같이 쓴다는 그들이다. 그들은 40년이 넘게 서로 머리를 다듬어주고 염색해 주는 동안 서로를 닮아가며 함께 늙어간 모양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게 뭐냐는 질문에 "서로 염색해 주는 것"이라고 답해도 될 지도 모른다.

 

그날 염색을 마치고 아내가 늦은 점심으로 냉면을 만들어 주었다. 마주 앉아 냉면 가닥을 후루룩 넘기다 보니 이렇게 고요하고 평범하게 늙어 갈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좁은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하는 오래된 노래도 흥얼거렸을 것이다.

 

염색을 한번 하면 머리가 웃자랐을 때 얼룩덜룩 보기 싫어져서 계속해야 한다는데 그래도 나는 이번 한번으로 끝낼 생각이다. 한번쯤은 까만 머리로 나다니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래도 내 본 모습을 감출 것까지야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가을이 왔다. 흰 머리칼을 까맣게 물들이듯, 찌는 듯 무더웠던 지난여름을 헤쳐 나오느라 지친 마음을 새 단장해 삽상한 바람을 맞아보면 어떨까 싶은 어느 가을날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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