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만들기

토론마당 게시판 리스트
여름〈250〉
작 성 자 문화공보과 등록일 2017-07-28 조   회 283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 온 지 이제 1년이 지났다. 그래봐야 대문 밖만 나서면 온갖 소음이 뒤섞인 도심일 뿐이지만 손톱만한 마당이 딸린 것은 그나마 위안이다. 고물고물 개미떼도 있고 비오는 날엔 지렁이도 기어 다닌다. 비오는 날엔 이따금 길고양이도 찾아들어 대문 처마 아래 쪼그려 앉아 잠간 비를 긋기도 한다.


 학기말이라 학생들 성적 처리하느라고 새벽에야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아침 아홉시 반인데 식구들은 다들 출근하고 텅 빈 집에 나만 남았다. 마당가에 놓아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길게 뻗고 모처럼 게으름을 부렸다. 하늘 한번 쳐다보며 담배 한 모금 빨고 나무와 꽃 한번 쳐다보며 또 한 모금 빤다. 글쎄, 이웃 눈치 보지 않고 마당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것도 단독주택의 또 다른 장점(?)이긴 하지만 끊기는 끊어야 할 터이다. 모처럼의 아침 여유를 즐기듯 친한 시인이 우편으로 보내온 시집도 펼쳐 본다.


 올해는 가뭄 때문인지, 꽃에도 해거리가 있는 건지 지난해 소담하게 피었던 치자꽃도 시들시들 피었다가 제풀에 지고, 쌀알 같은 꽃잎을 마당에 수북이 떨어트렸던 아왜나무는 아예 꽃을 피울 생각도 않는다.


 문득 생각이 나서 고무호스를 끌어다가 나무와 꽃에 물세례를 안겼다. 마당가 한쪽에 제멋대로 심겨진 깻잎에도 물을 주었다. 지난해엔 요긴한 여름반찬이 돼 줬지만 올해는 역시 시원찮아서 깻잎절임이 돼 식탁에 오를 수나 있을까 싶다. 가뭄도 가뭄이지만 집 근처에 버티고 선 높다란 빌딩들이 볕을 가린 탓도 크다. 글쎄, 물 기근에 농사짓는 분들 고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데, 시원한 비가 한 이틀만 실컷 내려줬으면 싶기도 하다.


 물을 맞은 나무와 풀들이 모처럼 생기를 되찾은 듯 푸르르 떤다. 호스 끝을 눌러 불쑥 솟은 나무의 잎새에 물을 뿌렸더니 허공에 작은 무지개가 뜬다. 다시 의자에 앉아 시집을 펼쳐드는데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봄에 심어 올라온 상추 씨를 올라오는 족족 다 뜯어먹은 영철 씨가 봄에 심고 남은 상추 씨를 한여름에 또 뿌렸다. 아니면 그뿐이라고 작정했을 영철 씨, 철은 아니지만 철없는 영철 씨가 실망할까봐 상추 씨는 급하게 대궁부터 밀어 올렸다. 정말 딱한 일이었으나 이제부터 내가 줄 건 이것뿐이라고 이것뿐이라고 쑥쑥 간밤에 긴 대궁을 밀어 올렸다.(최영철 시 <비철 이야기> 중)


 집사람이 끓여놓고 간 갈치찌개에다 달걀 프라이 하나 부치고, 밑반찬 꺼내 아점 챙겨먹고 종강하러 학교에 가는 길, 이마에 닿는 햇살이 제법 따갑다. 곧 시작될 여름방학을 생각하니 곗돈 탈 달이 다가온 주부처럼 마음이 설렌다. 방학 끝나면 그 동안 내가 무얼 했나 싶어 물처럼 흘려보낸 시간이 늘 아쉽지만, 방학이 다가오면 어린애처럼 기다려진다. 이제 여름이 제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강동수 소설가·경성대 교수

첨부파일
목록
OPEN 공공누리 - 공공저작물 :출처표시, 비영리목적으로 2차저작물 변경하여 자유이용허락    공공누리 출처표시 후 저작물 변경없이 비영리목적으로만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담당부서 정보

  • 담당부서 총무국  문화관광과   
  • 담당자황순규
  • 문의전화051-550-4074

콘텐츠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어느 정도 만족하셨습니까?

만족도 조사

방문자 통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