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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길산 시인이 쓰는 문학과 동래이야기 19 문인갑 수필가
작 성 자 문화관광과 등록일 2020-07-27 조   회 37

동길산 시인이 쓰는 문학과 동래이야기 19   문인갑 수필가
동길산 시인이 쓰는 문학과 동래이야기 19   문인갑 수필가
동길산 시인이 쓰는 문학과 동래이야기 19   문인갑 수필가


"광복 전날 감옥에서 병아리 수백 마리 꿈꿔" 

내 초등학교 동창 중에는 저 유명한 동래학춤의 인간문화재인 김희연 군과 꽹과리 잘 치는 양세주 군이 있었다. 봄철 동창회가 열리면 김 군의 학춤과 양 군의 꽹과리에 내 장구의 능한 솜씨가 어울렸을 때는 참 멋진 한마당이 펼쳐졌던 것이다. 우리 동창회의 농악놀이가 유명해져서 해마다 동래온천 기생들이 자진 동참해서 더욱 놀이를 빛내 주었다. 그 친구들도 그 기생들도 벌써 모두 다 가고 이제 나 혼자만 남았다.
   - 문인갑 수필 장구나 치며 살아야지에서

문인갑(1923~2008) 수필가는 동래의 산 역사였다. 내성초등학교(26회)와 동래고(19회)를 졸업했고 모교에서 교감을 지냈다. 동래고 총동창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평생 교직에 몸담으며 부산사대 부속고 교장으로 퇴임했다. 수필집 <풍류에 세월 싣고>와 <산 절로 수 절로 하니>를 냈다. 1974년 수필문인단체에 가입했으며 한국수필가협회와 부산문인협회 회원, 수필부산문학회 회장을 지냈다.
수봉(秀峯). 선생의 호다. 여러 의미로 읽힌다. 훤칠하고 컸던 선생의 수려한 용모일 수도 있고 가장 높은 산꼭대기일 수도 있다. 장산 자락 반여동에서 태어났기에 장산 꼭대기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선생을 아는 이들은 민족의 우뚝한 봉우리로 해석했다. 선생은 일제강점기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른 강건한 독립투사였다.
8월 14일 밤 꿈에 노란 달걀을 깨고 하얀 병아리 수백 마리가 쏟아져 나왔다. 두 번째 옥고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다음 날 끝났다. 해방이 되지 않았으면 옥중에서 순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해방되기 전날 꿨다는 병아리 꿈은 조국 광복의 꿈이었고 신생의 꿈이었다. 꿈 이야기는 선생이 타계한 2008년 그해 문예지 <수필> 여름호에 실렸다. 선생이 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수필부산문학회는 <수필> 여름호를 선생 추모 특집으로 꾸몄다.
선생은 첫 옥고를 1940년 치렀다. 그 유명한 노다이 사건 때였다. 그때 선생은 동래중(이때는 동래고를 동래중이라 했다) 4학년이었다. 대신동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경남 학생 경기대회 심판장은 부산기지사령관 노다이(乃台) 대좌. 판정이 편파적이었다. 동래중과 부산제2상업학교 4, 5학년 400여 명은 극렬하게 항의했다. 반일감정에 불을 지른 격이었다. 항의는 가두행진으로 이어졌고 영주동에 있던 노다이 관사 습격에 이르렀다.
후유증은 컸다. 두 학교에서 200여 명이 체포됐다. 이들은 모두 모진 고문을 당했다. 검찰청 송청 15명, 퇴학 21명, 정학 44명, 견책 10명이었다. 선생도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서 풀려났다. 풀려날 상황은 아니었지만 한 해 선배인 5학년들이 자기들만의 행동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은 덕분이었다. 모진 고문에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당차고 장한 선배들이었다. 학교로 돌아온 선생에겐 12일 유기정학 처분이 내려졌다.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탑 뒷면에 선생의 이름 석 자가 새겨져 있다.
당시 교장은 원전(原田). 학생들에게 유리하게 증언하고선 사표를 내었다. 이듬해 부임한 우야(宇野) 교장은 독종이었다. 정신교육을 빙자해 매일 아침 한 시간씩 강당에 꿇어 앉혔다. 교사조차 분개했다. 5학년 문인갑은 분연히 들고 일어났고 그 일로 또 정학을 당했다. 이번에는 무기정학이었다. 이때부터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해 본격적인 저항에 나섰다. 남기명, 김일규, 김진훈 등이 주역이었다. 독서회는 이후 조선청년독립당으로 확대했다. 선생은 농촌 지도와 국내조사 행동반 책임을 맡았다.
  졸업을 앞두고 또 사달이 났다. 졸업 두어 달 전인 1942년 1월이었다. 겨울방학 숙제로 쓴 작문 연두(年頭)의 소감이 우야 교장에게 발각되면서였다. 이 때문에 졸업이 유보됐다. 19회 동기들 졸업식은 3월 5일 열렸지만 선생은 보름이나 지난 3월 22일 교무실에서 혼자 졸업했다. 동래중 7회 졸업생인 가형이 애쓴 덕분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선생은 본격적인 반일운동에 나섰다. 1944년 8월에는 조선청년독립당 회원들과 군용열차 폭파 계획을 세웠다. 다이너마이트까지 구했다. 열차가 지나가는 시각 구포 철교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다는 계획은 사전에 비밀이 샜다. 이 일로 선생은 그해 8월 10일 반여동 자택에서 체포돼 또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1944년 9월 15일 대신동 부산형무소로 이송돼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월 광복을 맞으면서 비로소 영어의 몸에서 벗어났다.
선생은 광복 이후 교직의 길에 들어섰다. 1945년 검정고시에 합격해 중등학교 국사 교사로 발령 났고 1988년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했다. 교직에 있으면서는 옥고 치른 이야기는 극구 꺼렸다. 가야금과 서화, 그리고 수필로 일가를 이루었다. 2008년 2월 17일 향년 85세로 타계했다.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모셔져 있다.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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