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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길산 시인이 쓰는 문학과 동래이야기 ⑫ 박문하 수필가
작 성 자 문화관광과 등록일 2019-12-26 조   회 15

동길산 시인이 쓰는 문학과 동래이야기 ⑫ 박문하 수필가
동길산 시인이 쓰는 문학과 동래이야기 ⑫ 박문하 수필가



동래파적·민중병원장·박차정 친동생 

… 동래파적 맛은 옛날엔 진주집이 제일 유명하여서 김철수 씨가 경상남도지사로 재직 중에는 서울서 귀한 손님들이 올 때마다 이십 리 길을 멀다 않고 이 집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진주집은 은퇴하고 동래고등학교 입구의 발집과 동래구청 앞 낭자집이 서로 백중을 겨루고 있다. 그런데 봄철에 먼 곳에서 찾아오는 반가운 친구가 있으면 나는 고향의 명물인 파적을 대접하는 것을 유일한 즐거움과 자랑으로 삼고 있다.
 - 박문하 수필 <동래파적>에서

<동래파적>은 55년 전 수필이다. 1963년 3월 21일 국제신문에 실렸다. 글을 쓴 이는 박문하(1918∼1975) 수필가. 동래 토박이로 호가 우하(雨荷)였다. 비 우 연꽃 하, 비 맞는 연꽃이었다. 서정적인 호를 쓴 작가답게 글은 서정에 넘쳤고 사람은 인정에 넘쳤다. 지인이 찾아오면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다. 따뜻한 술잔, 훈훈한 마음을 나누고서야 보냈다. 향파, 청마, 요산에 이어 1970년대 초반 제4대 부산문인협회 회장을 지냈다.
동래시장 민중병원. 지금 50대 이상 동래 사람이면 낯이 익은 병원이다. 수안동 치안센터 길 건너편, 동래시장 아래 사거리 모퉁이 상가건물 2층에 있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개업해 1970년대 중반까지 동래의 약손이었다. 민중병원 원장이 수필가 박문하였다. 살림집은 상가 뒤편 골목 아담한 양옥집. 당시 주소는 수안동 421-26번지였다. 당호가 우하장(雨荷莊)이었다. 여기서 집필했다.     
문인협회 회장에 병원 원장. 모르는 사람은 그가 금수저이려니 여기겠다. 돈 적당히 있고 출세욕 적당히 있는 여유 계층으로 여기기도 하겠다. <동래파적>에서 엿보듯 발표하는 글에는 술 이야기가 넘쳤고 해학이 넘쳤다. 그러나 흙수저도 그런 흙수저가 없었다. 한 생애가 짊어져야 했던 짐은 무거웠고 고단했다. 태어나서부터 작고할 때까지 그랬다.
환갑이 채 안 되는 생애. 박문하의 생애를 떠올리고 그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를 떠올리면 이 세상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박문하. 생각할수록 무거운 이름이다. 일면식이 없는 나도 그럴진대 당사자와 그 가족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술 이야기 넘치고 해학이 넘쳐 일견 가벼워 보이기도 하는 그의 수필은 무거운 생애를 잊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으며 자가치료였다.
동래고 정문 앞에 있는 박문하 생가는 지금 기념물이다. 박문하 생가라서 그런 건 아니고 그의 누나 생가라서 그렇다. 항일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가 친누나다. 박문하 집안은 아버지부터 남매가 모두 항일지사다. 동래고 전신인 개양학교를 나온 아버지 박용한은 일제 무단통치에 항거해 1918년 1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결했다. 그해 3월 태어난 박문하는 아버지 생전 얼굴을 못 본 유복자였다. 어머니 김맹련은 독립운동가이며 제헌 의원인 김약수와 사촌지간이었다.
부모의 기질과 정신은 자녀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박문하는 막내였다. 누나 박차정이 항일전선 최일선에서 항거하다 순국했고 큰형 박문희는 독립운동 단체 신간회에서 헌신하다가 일제 경찰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작은형 박문호 역시 중국에서 의열단 간부로 암약하다 일제 경찰에 의해 5년 옥고를 치른 뒤 다른 죄로 다시 검거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박문희·문호·차정은 한국을 대표하는 독립유공자 3남매다.  
남매의 막내 박문하인들 편했을까. 일제 관헌의 감시와 가택수색을 견디지 못해 중국으로 갔고 거기서 밀정의 함정에 빠져 작은형과 검거된다. 형은 5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자신은 미성년자라서 한국으로 송환돼 갖은 고초를 겪는다. 친척 집에서 눈칫밥을 얻어먹었으며 친척이 있는 청도 운문사에서 중이 된다. 2년 남짓 승방 생활을 하다가 병원 조수가 되고 독학으로 의사가 된다. 누나 남편인 의열단장 출신 김원봉이 월북하는 바람에 당국의 혹독한 견제를 받는 등 광복 이후에도 삶은 신산했다.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4년 7월 29일 장남이 익사했다. 연세대 의대생인 아들이 방학을 맞아 집에 왔고 가족이며 친구와 함께 송정해수욕장에서 피서하다가 그만 변을 당한다. 환갑이 되는 날 병원을 물려 맡기고 문학으로 전신하리라던 소망은 한순간 물거품이 되었다. 환자가 없으면 진료실에서도 술을 홀짝거렸다. 두 홉짜리 소주와 소금에 절인 땅콩 한 접시였다. 지인이 오면 술집을 찾았다. 그러면서 간 경화와 간암이 왔고 1975년 3월 31일 새벽 3시 40분, 58세 기구한 생애를 접었다.
삶은 기구했지만 작품은 빛났다. 생전 네 권의 수필집을 냈고 작고하던 해 전국 유명 수필가가 참여한 추모 수필집 <여백의 예술>이 범우사에서 나왔다. 2008년에는 부산문인협회가 두 권짜리 <박문하 전집>을 내었다.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18년부터 우하수필문학상을 제정, 그의 문학과 삶을 기린다.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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