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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길산 시인의 문학과 동래이야기 ⑩ 한강봉산욕행록
작 성 자 문화관광과 등록일 2019-10-28 조   회 17

동길산 시인의 문학과 동래이야기  ⑩ 한강봉산욕행록
동길산 시인의 문학과 동래이야기  ⑩ 한강봉산욕행록

 

조선 대학자, 동래에 한 달 머물다

동래 온천장은 옛날 나라가 관리하던 목욕탕이었다. 고관대작은 물론 임금까지 애용했다. 조선시대는 동래부사가 관리했다. 1766년 세운 옛 비석 온정개건비엔 그러한 내력이 상세히 새겨져 있다. 온정개건비를 세우기 150년 전 펴낸 <한강봉산욕행록(寒岡蓬山浴行錄)>은 조선 중기 대표적 유학자 한강 정구와 제자 일행이 45일간 여행을 다닌 기록이다. 45일 가운데 30일을 동래 온천에서 보냈으니 동래 기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봉산은 동래 별호. 봉래, 내산(萊山)으로도 불렸다.

정구(1543~1620)는 소신파였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고 실천했다. 그의 스승 이황을 배척한 친구와 절교했으며 역모 사건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라며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고선 고관 자리를 내던진 채 경북 성주로 낙향했다. <심경발휘(心經發揮)> 등 다양한 분야, 방대한 저술은 영남 성리학 규범이었다. 절개와 기개, 학문적 높이를 흠모해 너도나도 스승으로 모시려 했다. 제자들이 정구를 모시고 동래 온정(溫井) 욕행에 나선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7월 20일 맑음(七月二十日晴). 봉산욕행록은 일기 형식이다. 7월 20일부터 시작한다. 물론 음력이다. 양력으론 찬 바람 부는 9월쯤 된다. 월일 앞에는 만력 정사(萬曆丁巳)라는 연도가 표기돼 있다. 설명하면 좀 길어지니 광해군 9년(1617년) 정도로만 알아두자. 욕행록은 이날부터 9월 5일까지 행적을 소상히 밝힌다. 특이한 것은 쉰 명 가까운 동행자 이름순서다. 누구는 이름을 적고 누구는 직책, 또는 지역을 적었는데 요즘처럼 가나다 순으로 적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름순서는 예민한 사안인 모양.    
계삼명한강선생이견여발(鷄三鳴寒岡先生以肩輿發). 동행자 성명을 장황하게 열거한 첫날 일기는 닭 울음이 맨 처음 나온다. 닭이 세 번 울자 75세 노구의 한강 선생이 탄 가마가 출발하면서 45일 대장정은 시작한다. 성주 인근 칠곡 지암(枝巖)이란 곳에 이르러 배를 타기 전 채몽연 등 몇 사람이 합류했으며 인사드리러 온 사람은 누구누구인지 밝힌다. 혼잡하면서도 흥겨운 정경이다. 다음 날도 날씨가 쾌청해 동래 온천장으로 가는 욕행은 순조롭다. 현풍, 고령, 창녕, 영산, 밀양, 김해를 거쳐 마침내 엿새 만인 7월 26일 일행은 동래 온천장에 도착한다.
오시에 온정의 욕소에 도착했다. 동래부사는 지난봄에 이미 선생께서 이곳에 와서 목욕하실 것이란 말을 듣고 2실(室) 1청(廳) 규모의 초옥을 별도로 지었는데 매우 정결하였다. 지금 선생을 따라온 자가 많은 것을 알고는 다시 임시가옥 2칸을 지어 제자들이 거처할 곳으로 삼았으니 그 정성을 족히 알 수 있었다. 정(井)의 안팎에는 석감(石龕)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왕이 만든 것이라 한다. 하나의 감에는 오륙 명씩 들어갈 수 있고 샘은 위쪽의 석공(石孔)에서 흘러나오는데 물이 매우 뜨거워 손과 발을 함부로 담글 수가 없다.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 지금 내가 들여다보는 옛 비석 명칭이다. 동래 온천을 상징하는 비석으로 온천장 어름에 있다. 비석 맨 위는 큰 글씨로 온정개건비라고 새겼고 비석 한 면 가득 한자가 빽빽하다. 한강 선생 일행이 다녀가고 150년 지나서인 1766년 동래부사 강필리가 온천 욕탕을 개축한 공을 기려 세운 송덕비다. 욕탕은 어떻게 개축했을까. 큰 돌로 탕 두 개를 만들어 남녀가 별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9칸의 욕사를 새로이 짓고 세웠다.
큰 돌로 탕 두 개! 송덕비 아래 놓인 화강암 욕조는 네모반듯하면서 고색창연하다. 그러니까 큰 돌로 만든 탕 둘 가운데 하나다. 알려지기론 남탕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저렇게 생긴 돌 욕탕에 한강 선생과 그 일행이 피로한 육신을 담갔으며 저 욕탕에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육신을 담갔으리라. 지금은 저 욕탕에 몸을 담갔다는 증언은커녕 기억조차 죄다 사라졌기에 그것을 기록한 <한강봉산욕행록>은 소중하다. 동래는 당사자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한강봉산욕행록>은 당대 필독서였다. 한강 정구의 위상이 그만큼 높았고 기행문학 백미였다. 동래라는 지역에 갖는 지식인층 호감도 작용했다. 동래는 맨몸으로 왜적에 맞선 임진왜란 성지였으며 동래정씨 정서가 남긴 정과정곡으로 대표되는 충절의 성소였다. 조선의 유림이라면 누구라도 동래를 선망했으며 그러한 선망의 결정판이 <한강봉산욕행록>이었다. 필독서답게 간행도 많이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도 있고 부산박물관에도 있고 부산시립 시민도서관에도 있다. 경매에도 종종 나온다. 이제는 도서관 도시 동래가 나설 때다.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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