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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길산 시인이 쓰는 문학과 동래이야기 ⑥ 소설가 김정한의 옥중시(詩)
작 성 자 문화관광과 등록일 2019-06-25 조   회 40

동길산 시인이 쓰는 문학과 동래이야기 ⑥  소설가 김정한의 옥중시(詩)
동길산 시인이 쓰는 문학과 동래이야기 ⑥  소설가 김정한의 옥중시(詩)


감방 벽돌 가루로 시를 쓰다

동래고보 출신 김정한(1908∼1996) 소설가는 반골이었다. 동래사람 카랑카랑한 기질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했다. 매사 그랬다. 그래서 삶은 강단졌으나 강팔랐고 뜻은 고결했으니 고단했다.
"자식의 손버릇이 나쁘면 고치도록 꾸짖어야 한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은 바로 자식을 길들이는 어버이의 마음과 같다."
김정한이 생전에 했던 말이다. 소설가 최화수가 국제신문 문화부 기자로 있으면서 썼던 1977년 9월 탐방기사에 나온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 마음으로 불의를 고발하며 사람답게 살아가려 했던 이가 요산 김정한이다. 요산(樂山)은 그의 호다.

요산은 매사 그랬다. 나보다 우리를 생각했고 오늘보다 내일을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했다. 번번이 현실의 높다란 벽에 좌절해야 했다. 번번이 역부족이었다. 그로 인해 일제강점기 세 차례나 경찰에 검거됐으며 광복이 되고 나서도 세 차례 감옥에 갔다.
고문은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그것도 미리 각오한 바였다. 때리고, 차고, 쑤시고, 물을 먹이고…. 그러다간 단념을 했는지, 지친 탓인지 굴뚝시험이라는 장난까지 하였다. 굴뚝시험이란 긴 신문지를 길게 말아서 두 콧구멍에 굴뚝처럼 꽂아 두고, 그 끝에 불을 붙여 연기가 코로 들어가게 하는 고문이다. 눈알이 빠지는 것 같고 코끝이 타다가 정신이 나가버린다.
1928년 울산대현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있으면서 민족적인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조선인 교원연맹 조직을 계획, 일경으로부터 가택 수색을 받고 피검. 1932년 양산농민사건에 관련했다가 피검. 1940년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인수하여 지국 일에 전념하던 중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명으로 피검.
요산이 스스로 밝힌 연보에 나오는 피검 기록이다. 모두 일제강점기 이야기다. 요산이 일흔 되던 1978년 발간한 삼성출판사 <한국현대문학전집> 23권에 실린 자전 연보는 그러나 광복 이후 세 차례 수감 기록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을 언급하기엔 당시 시국이 살벌했고 엄혹했던 탓이다.
자전 연보에 언급하지 못했던 수감 기록은 뭘까. 뭐였기에 나이 일흔에 이르도록 심중에 묻어둬야 했을까. 1978년 그 무렵은 유신 독재가 극으로 치닫던 시절. 지금과 달리 사회적 금기가 숱했다. 말하면 안 되는 금기가 장삼이사 숱한 삶을 옥죄었다.
1946년 미 군정에 끌려가 옥살이. 1950년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8개월 형무소 복역. 1961년 투서 음모로 인해 수감. 광복 이후 요산이 겪었던 수감 면면이다.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박정희 시대엔 어느 것 하나 까발릴 수 없는 거였다. 자칫 자식까지 연좌제 사슬에 옥죌 형국이었다.
다만, 1946년 미 군정 옥살이는 본인 증언과 달리 공식 기록엔 보이지 않는다. 증언이 거짓이 아니라면 본명과 본적을 다르게 둘러댔을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허술한 시대였다. 그러니까 죄 없는 사람을 잡아가 죄인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수감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신분이 확실했다. 1950년 수감할 때는 부산중학교 교사였고 1961년 수감 때는 부산대 교수였다. 1950년에는 8월 15일부터 8개월, 1961년에는 8월 28일부터 개천절까지였다.
나는 곧 손톱으로 그놈(감방 벽돌 벽)을 한번 긁적거려 보았다. 무척 딱딱했지만, 딱딱한 대로 조금씩 가루가 떨어졌다. 그놈을 손바닥 가운데 모아서 침으로 이개어 보았다(중략). 나는 곧 대젓가락 끝을 조금 깨물어서 붓끝같이 만들었다. 그걸 손바닥 가운데의 약간 불그레한 침에 적셔서 옷깃에 묻혀 보았다. 역시 된다. 글씨가(후략).
요산의 옥중시 50~60수는 이렇게 지어졌다. 감방 벽돌 벽을 긁어 나온 가루에 침 묻혀 입고 있던 차입 옷 안쪽에 쓴 시였다. 정황상 1950년 감옥에서 썼을 이 시들은 그러나 요산이 풀려나갔을 때는 한 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찾을 길도 없었다. 그 옷을 면회 온 부인에게 주었지만 다른 옷이 없었던 가난한 부인은 시가 적힌 줄 모르고 빨아서 옥중 남편에게 차입했다.

우르르 떠나는/압송차 뒤를 따라//미친 듯 달리다/넘어지던 아내 모습//가을밤 깊어갈수록/더욱 생각나기도.//비에 젖은 압송차/창밖에 붙어 서서//다시는 날 못 볼 듯/그렇게 흐느끼던 애들//이 밤은 너희들에게/얼마나 추운고?

요산이 기억으로 재생한 옥중시다. 6월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달. 요산의 옥중시는 1950년 한국전쟁 산물이다. 찾을 길 없어 한 자 한 자 기억으로 재생했을 한 편을 되새기며 동래 정신의 상징이자 우리 시대 큰 작가 요산을 기린다.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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