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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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03 ㅣ 2018.05.02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져 나와 평범한 사람들의 속을 뒤집는 게 있다. 이른바 갑질이 그것이다. 갑질이란 건 한국에만 특유한 현상인 모양이다. 언젠가 외국인과 식사를 같이 하다가 우연히 갑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가 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한참 설명해야 했다.


일부러 영어사전을 찾아봤더니, 갑질에 해당하는 똑 부러진 영어 단어가 없었다. 자신의 힘을 오용함이라거나 우두머리 행세를 함하는 식으로 풀어서 설명하는 정도였다. 하기야 갑질이란 우리말도 내력이 그리 오래된 건 아니다.


갑질이란 말의 유래는 다들 아는 대로다. 계약서를 쓸 때 계약 당사자를 갑과 을로 줄여 쓰곤 하는데,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이 갑으로 지칭되는 데서 온 말이다. 집주인이 갑이고 세입자가 을, 고용주가 갑이고 피고용자가 을인 것처럼. 직장에선 상사가 갑의 위치에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겠다.


어쨌거나, 갑질이란 말이 한국에서 그렇게 자주 쓰이고 때로는 뉴스까지 장식하는 건 그 만큼 우리 사회가 불평등, 불공정하다는 뜻이겠다. 집주인이건 세든 사람이건, 사장이건 말단이건, 외국에선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책임을 행사할 뿐 약자를 착취하거나 인간적으로 모멸을 주는 일이 적다는 뜻일 거다. 문명국일수록 약자에 대한 법적·사회적 보호 장치가 잘 돼 있기 때문이기도 할 터.


한 재벌가 여성이 땅콩 회항 사건으로 유명세(?)를 치른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이번엔 그 동생이 자기네 회사가 발주하는 광고대행사 관계자에게 고함지르고 물을 뿌렸대서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다. 아버지뻘 되는 간부에게도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일상사로 내뱉었다는 고발도 잇따르고 있다. 글쎄, 자매는 용감했다고나 해야 할지.


이 집만 그랬던 건 아니다. 술자리에서 변호사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폭행한 또 다른 재벌가 도련님이 있었는가 하면, 운전기사를 종처럼 부리면서 걸핏하면 뒤통수를 때린 사장님도 있었다. 그들에게 분노조절장애가 있었던 게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도 있지만, 공식석상에선 멀쩡히 행동하는 걸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그들의 갑질은 특권의식 때문일 터. 나는 태생부터 너희와 다르다는 오만함을 어릴 적부터 무의식 속에서 키워왔던 거다. 타인을 짓밟으면서도 "이 회사는 내 꺼야, 누가 감히 건드려"하는 오만 때문에 자기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거다. 글쎄, 그들이 평생에 한번 잘한 일이라고는 재벌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뿐일 텐데 말이다.


어쨌거나 이런 이야기를 뉴스에서 마주치면 공연히 열통(?)이 터진다. 하기야 재벌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갑질은 자주 발견된다. 재벌의 갑질에 분개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강자의 위치에 서면 약자를 괴롭히는 걸 적잖게 봐 왔으니.


우리 사회가 꽤 민주화되고 정의롭게 됐다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렇고, 나도 혹시 누군가에게 갑질을 하지 않았는지, 하다못해 식당 종업원을 함부로 대하지나 않았는지 슬며시 찔린다.


강동수 소설가·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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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22 ㅣ 2018.03.30

날씨는 아직 좀 새치름하지만 어느덧 봄이다. 얼마 전 개강을 했을 때 나는 새 기분을 낸답시고 오랜만에 동네 미장원엘 가서 겨우내 더부룩해진 머리를 짧게 깎았더랬다.


아내에게 맡겨 허옇게 센 머리칼을 까맣게 염색도 했다. 염색 따위 해선 뭐하냐고 한마디 했더니 마누라님께서 "요즘 애들은 할아버지 선생을 안 좋아한다는 것도 몰라요? 젊어 뵈면 좋지 뭘"하고 반격을 해 왔기 때문이다.


 쉬는 날엔 마누라의 성화에 못 이겨 새 옷도 사러갔다. 할인 아웃렛에서 초봄에 입을 만한 콤비 정장을 한 벌 사 입었다. 내친 김에 내년 겨울에 입자고 이월상품으로 순모 코트도 아주 싸게 장만했다. 그동안 입었던 코트가 10년도 넘어 실밥이 나들나들 드러났기 때문이다.


옷을 차려 입고 매장의 거울에 비추어봤더니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젊어 보이긴 했다. 이마에 깊이 파인 주름살이야 어쩌겠느냐만. 돌아오는 길에는 옷을 사준 보답으로 맛집을 찾아가 아내에게 추어탕을 한 턱 쏘았다.


 어쨌거나 삼월의 캠퍼스는 활기차다. 젊음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거다. 강의실에 앉아있는 새내기들을 보면 어느새 봄이 왔구나 하고 새삼 느끼게 된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입시 준비에 시달렸던 아이들 아닌가. 나름대로 멋을 한껏 내 버들개지처럼 피어오른 얼굴로 재깔거리는 아이들을 지켜보면 내 기분도 따라서 좋아진다. 글쎄, 학년이 올라갈수록 취업 준비다 뭐다 해서 인생의 쓴 맛(?)을 조금씩 맛볼 터이지만 이제 막 대학의 교문으로 들어선 지금이 그들에겐 가장 빛나는 시간이 아닐까.


 오래 전 본 홍콩영화 중에 화양연화(花樣年華)란 게 있었다. 왕가위 감독이 만든 영화였는데 같은 날 한 아파트에 이사 온 남녀가 각자의 배우자가 외도하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그들도 서로 만나 외로움을 위로받지만 결국 자기네 가정으로 되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멜랑콜리하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영화 전편을 감싸 애잔해졌던 기억이 난다. 영화 제목인 화양연화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꽃다운 시절 쯤 될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시절은 얼마나 짧은가. 새내기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면서 나의 꽃다웠던 시절을 떠올려 보지만 근 40년 전의 그 때는 안개처럼 기억 속에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그런 시절을 거쳐 지금의 내가 있지 않았나 하고 스스로를 짐짓 위로(?)해 보는 거다. 지금의 내가 인생에서 느껴야 할 건 또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서.
 출근길에 짬을 내 일부러 한 시간쯤 걸어 다니는 온천천변에도 동백이 빨갛게 피었고 버들개지에도 싹이 텄다. 볼에 닿는 미풍에도 봄기운이 서려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살아 있음의 충일감을 느낀다. 하고 보면 내 집 마당가의 목련나무에도 총알처럼 생긴 수백 개의 봉오리가 개화를 기다리며 하늘을 향해 곧추서 있다.


곧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화사한 중춘(仲春)이 펼쳐지리라. 봄이다.

강동수 소설가·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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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99 ㅣ 2018.02.27

최근 일어나고 있는 성폭력 피해 고발 운동인 #Me Too 캠페인이 갈수록 큰 사회적 파장을 낳고 있다. 한 여성 검사가 지금은 현직을 떠난 검사장급 검사에게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폭로로 시작된 이 운동은 누구나 이름을 알만한 원로 시인에 대한 고발로 이어지더니 얼마 전엔 연극계의 유명 연출가에게로 불똥이 튀었다.


거명되는 당사자가 유명인이고 그들의 숨겨진 치부가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운동은 한 10년 쯤 전 우리사회를 달궜던 유명인 학력 위조 파문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유명 탤런트에서 연극배우, 작곡가는 물론 스님에 이르기까지 잇따라 학력 위조 사실이 들통 나거나 스스로 그것을 고백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터다.


그런데 학력 위조는 당사자의 도덕성 문제이지만 성폭력은 피해자가 따로 발생하고, 그 상처가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점에서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번에 #Me Too 운동의 불을 댕긴 여성 검사만 하더라도 그 사건이 일어난 지 8년이 지나도록 수치감과 분노로 고통을 받았다지 않았던가.


다시 말해 성폭력은 피해 당사자인 여성에게는 영혼 깊숙이 칼로 베어진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인 것.


따지고 보면 성폭력은 결코 유명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상 곳곳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한국사회의 병폐 중의 하나가 아닌가. 성범죄는 길거리 불량배에서부터 직장인, 공무원, 지식인, 권력자에 이르기까지 차고 넘친다.


그런데도 오랜 세월 성폭력 문제가 우리 사회의 표면에 떠오르지 않고 잠겨 있었던 것은 그게 사회적 권력 문제와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피해 사실을 고발했다가 찍혀서 또 다른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그리고 피해자인데도 오히려 품행이 단정하지 못한 사람이란 차가운 시선을 받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오랜 세월 고통을 가슴 속에 담아둔 채 혼자 끙끙 앓았던 거다.


그런데 남성들이 아직도 성폭력 문제에 대해 둔감한 게 문제다. 친밀감의 표시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여성들과 함부로 신체 접촉을 하려들거나, 저질의 성적 언사를 함부로 내뱉으면서도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우스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글쎄, 자신들이 내뱉은 말과 은근슬쩍 뻗은 손 때문에 누군가는 지울 수 없는 영혼의 상처를 입는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그런 변명을 하진 못할 거다.


"어떤 사회든 일탈하는 사람이 있다. 소수의 사례를 가지고 남성 전체를 도매금으로 비난하지 말라"고 항변하겠는가. 글쎄, 과연 그럴까. 일상에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성 폭력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내남없이 되짚어 볼 일이다. 그리고 가슴을 두드리며 "내 탓이오"하고 반성할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여성들을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절반의 사람으로 존중하는 의식을 무장하는 일일 터이다.


용기 있는 여성들이 촉발한 #Me Too 운동은 앞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번져나갈 것이다.


여성들도 입 다물고 참아내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걸 이제 깨닫기 시작했으니. 이 또한 우리 세상이 바뀌고 있는 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강동수 소설가·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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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23 ㅣ 2018.02.02

며칠만 지나면 결혼 30주년을 맞는다. 이십대 후반이었던 1988년 1월의 마지막 날  혼례식을 가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회갑을 눈앞에 둔 나이가 됐으니 세월이란 게 속절없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지난 연말에 2박3일의 짧은 남도여행을 다녀왔다. 아내와 단 둘이 나선 길이었다. 글쎄, 지난해까지만 해도 결혼 30주년이고 하니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올 참이었다. 유럽쯤이면 좋겠지만 따뜻한 동남아도 나쁘지는 않을 거란 생각도 했다. 결국 아내가 직장일 때문에 시간을 내지 못한다고 해서 그럼 전라도에라도 며칠 바람이나 쐬러갔다 오자고 했던 거다.


글쎄, 결혼 30주년인데 2박3일짜리 국내여행으로 때우게 돼 내심 아내에게 민망하긴 했다. 그래도 진도 바닷길을 드라이브 하고 뱃길로 청산도에 가서 볕바른 산길을 하이킹한 것은 나쁘지는 않았다. 완도의 일출공원에서 해맞이를 한 것도 그렇고…. 하기야 그건 순전히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 아내도 좋았는지는 모른다. 속으로는 풍광이 수려하고 햇살이 쏟아지는 스페인이나 그리스로 데려가지 못한 무능한 남편에게 혀를 찼는지도 모를 일.


아시다시피 결혼 25주년을 은혼(銀婚), 50주년을 금혼(金婚)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결혼 30주년은? 진주혼(眞珠婚)이라고 부른다나. 그렇다면 나는 아내에게 진주 반지라도 하나 사줘야 하나.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짝퉁 액세서리조차 단 한 번 사준 적이 없는 터라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굉장히 쑥스러울 것 같다. 인도에선 진주를 사랑의 보석이라고 한다는데 반지 대신 "사랑한다"고 말로 때운다면 아내의 반응을 어떨까? 아마도 이 양반이 뭘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멀뚱멀뚱 살피겠지.


진주는 조개에 이물질이 들어와 상처를 입히면 조개가 그 상처를 감싸기 위해 내놓는 분비물이 오랜 시간 뭉쳐서 생긴 보석이란 소릴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하고 보면 30년이란 세월은 인간들에게도 진주 하나쯤은 만들어 낼 수 있는 세월이 아닐까.


그 세월 동안 우여곡절이 왜 없었겠으며 고통과 슬픔의 시간은 또 얼마쯤이겠는가. 그런 세월을 이겨내며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이마에 주름이 파이는 동안 누구든 가슴에 진주 한 알쯤은 키웠을 터다. 속없는 나는 아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아픔이나 상처의 크기를 잘 모른다. 어쩌면 그 상처만한 커다란 진주가 가슴에 자라고 있을 지도 모른다.


결혼기념일 당일엔 어디 고기 집에나 데려가 한 끼 밥 사는 것으로 때우기 십상이겠지만 그래도 오래 전에 아내가 좋아했던 왁스란 가수가 부른 황혼의 문턱이란 노래를 함께 들으면 어떨까 싶다.


축복을 받으면서 세상에 태어나 사랑을 받으며 나 자라왔어. 교복을 입던 날 친굴 알게 됐고, 우연히도 사랑이란 걸 알게 됐어.(…)평범한 사람과 사랑하게 됐고 눈물겨웠었던 청혼을 받고 결혼식 하던 날 눈물짓고 있는 내 부모님 어느새 많이 늙으셨네. 그렇게 나는 결혼을 하고 날 닮은 예쁜 아이를 낳고 녀석이 벌써 학교에 들어갔네. 어느덧 세월은 날 붙잡고 황혼의 문턱으로 데려와 옛 추억에 짙은 한숨만 쉬게 하네.


그렇다. 30년이다.

강동수 소설가·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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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21 ㅣ 2018.01.03

다시 한 해의 갈림길에 선다.


신 새벽 떠오르는 해를 탄성과 함께 바라보던 올해의 원단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의 황혼녘이다. 따지고 보면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강물에 먹줄을 튕겨 경계를 지을 수 없듯, 세월에도 본디 마디가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런데도 새로운 세기니, 새해니 하고 시간에 끊임없이 금을 그어 무언가를 기념하고 추억거리를 만드는 것은 시간 앞에 무력한 인간의 슬픈 안간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할 때마다 상투적으로 동원되는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표현은 진부해진지 오래여서 그 성어 자체는 우리에게 아무런 감회도 불러일으키지 못하지만, 그래도 되짚어 보면 올해 우리 사회에 많은 일이 일어난 성 싶다.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의 촛불로 대통령이 탄핵됐고 5월엔 새 정부가 들어섰다. 권력의 단맛에 취해 거들먹거렸던 이들이 줄줄이 감옥행을 하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북한의 핵 도발로 1년 내내 국제사회의 시선이 한반도에 집중되기도 했다.


내 개인적으로는 올 한 해는 아주 좋은 일도 없었고, 크게 나쁜 일도 없었던 무색무취, 아니 무념무상의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나를 포함해 가족들이 무사히 한 해를 보낸 것만도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능력 보다는 욕심이 앞섰던 젊은 시절엔 물처럼 흘려보낸 시간에 대한 회한이 가슴을 치고는 했지만 이제는 한 해의 끝자락에 서면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아, 올 한 해도 별 탈 없이 살아냈구나!" 하는 감회 같은 것.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되는 일 보다 안 되는 일이 훨씬 더 많다는 것, 그리고 화려하고 폼(?)나는 삶 보다는 평범하지만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편안하다는 것을 체감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속절없는 세월에 아무런 아쉬움이 없을 수야 없다. 인생에서 넘겨야 할 캘린더가 조금씩 줄어들기 때문일까. 초라한 한 해의 성적표(?)를 들여다보면 남은 시간에 대한 조바심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사람을 속이는 법이어서 기쁨도 행복도 영원하지 않으며, 굳은 맹세도 시간 앞에 부식되지 않을 도리는 없다. 하지 못한 일,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슴 한 귀퉁이를 서늘하게 만드는 세월도 요즘이다.


글쎄, 이십대 청춘 시절에 내 앞에 주어졌던 제비뽑기 가운데 지금의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했다면 지금쯤의 나는 어떤 길에 서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란 시의 한 구절처럼.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짐짓 해보는 것도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노란 숲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 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오래 전에 추억은 미래에 있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다. 과거의 추억에 잠겨 사는 삶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더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는 경구일 것이다.


궂은 일, 가슴 아픈 일도 많았던 한 해이지만 지금은 새로운 추억을 찾아나서는 기쁨으로 가슴 설레는 때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 내일의 해는 내일 다시 뜬다.

강동수 소설가·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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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40 ㅣ 2017.11.30

동료 소설가가 책을 보내왔다. 책 제목은 당신은 모를 것이다. 얼마 전 서울에 다니러 갔다가 그의 집을 찾았을 때 책이 나온다는 소리를 들었던 터라 반갑게 펼쳐들었다.
 그는 중증 루게릭 환자다.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 목을 절개해 산소호흡기의 도움을 받고 있고, 위에 호스를 달아 유동식을 부어넣어야 한다. 목도 돌리지 못해 내가 갔을 때 그의 부인은 "여보, 강 선생 왔어요"하고 고개를 돌려줬던 터였다.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머리 위에 부착된 컴퓨터를 안구 마우스로 작동하는 것 밖에 없다.
 컴퓨터에 뜨는 자판을 눈꺼풀을 움직여 찍으면 컴퓨터에 장착된 카메라가 안구의 움직임을 포착해 한자 한자 글자를 만든다. 그러면 음성인식 장치가 남자 아나운서 목소리 같은 합성음을 들려주는 거다. 그날도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어서 오이라"하는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책은 발병한 후부터 병이 조금씩 깊어져 가는 경과를 꼼꼼히 담은 일종의 투병기에 단편소설 세 편을 묶은 것이었다. 그는 원래 부산의 고등학교 국어교사였는데 어느 날 아침 와이셔츠 단추를 채우려는데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더라는 거다.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면서 디스크 진단을 받고는 수술까지 했는데도 호전이 안 돼 다시 진단을 받은 결과 1년 여 만에야 루게릭이라는 걸 알았다.


 다들 알다시피 스티븐 호킹 박사가 앓았던 루게릭은 치료법이 아직 개발되지 않은 병이다. 온 몸의 근육이 하루에 한 움큼씩 소실돼 언어 기능을 잃고 나중엔 온 몸을 쓸 수 없게 된다. 이번에 그의 책을 읽고 나도 처음 안 것인데 온 몸을 저미는 듯한 차가운 통증이 몸을 스쳐간다고 한다.


글쎄, 은화처럼 명징한 정신으로 자신의 몸이 하루하루 굳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느꼈을 두려움을 나로선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는 책 속에서 담담하게 자신에게 닥쳤던 불행의 그림자를 고백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루게릭이 잔인한 것은 정확히 자신이 어떻게 죽어갈 지를 안다는 점. 수영장 바닥에 가라앉듯 서서히 자신의 죽음을 관망해야 한다는 점."


서울로 치료를 받으러 간 길에 아내가 지하철의 휠체어 서비스를 신청하러 간 사이 스티커처럼 벽에 등을 붙이고 서서 기다리며 그는 이렇게도 생각한다. "자기 몸을 자기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저 행인들은 감히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도 쓰고 있다.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카페 구석에 앉아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는 일, 아이들이 무심코 던진 공을 주워 다시 던져주는 일, 거실 천장에 전구를 가는 일, 자전거 페달을 신나게 밟는 일, 그토록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삶도 있다는 것을."


 그는 그 책에서 나와의 추억도 잠깐 언급했는데, 그 대목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의 고통을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마음을 너무나 모르고 있었던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지금도 한자 한자 눈으로 글을 쓰며 글을 쓰고 페이스북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그래서 삶은 아득하고 깊은 그 무엇이 아니겠는가.

강동수 소설가·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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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54 ㅣ 2017.11.01

 지난 추석 연휴 때의 이야기다. 이런 저런 일에 치였던 터라 처음엔 꼼짝 않고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들은 외국 여행도 간다는데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거냐고 마누라님이 성화(?)를 부리는 것이었다.


글쎄,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어딜 가나. 궁리 끝에 서울 나들이를 다녀오기로 했다. 추석에 서울 구경이라니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서울서 학교 다니는 아들놈도 볼 겸 지인들도 찾아볼 겸 겸사겸사 결정한 것. 추석날 오후 인터넷을 급작스레 뒤졌지만 마땅한 차편이 있을 리 있나. 서울까지 자동차를 끌고 가는 것도 자신이 없어 난감했다.


 겨우 고속버스의 빈 좌석을 찾아 휴대전화로 승차권을 끊었다. 길이 막혀 6시간 반이나 걸렸는데 지하철 막차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밤 열두 시 넘어 아들의 원룸에 들이닥쳤다. 다음날 아침 아들을 가이드처럼 앞세워 고궁나들이를 했다. 창덕궁, 창경궁, 운현궁, 종묘 등을 둘러봤는데 다른 곳은 여러 번 가봤지만 종묘는 처음이었다. 종묘 정전은 간결하고 장중한 조선 건축미의 본령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서울 구경 처음 온 시골 영감처럼 느긋하게 걷자고 시작한 길이었지만 종일 도심을 걸어 다녔더니 다리가 아팠다. 특히 인사동은 국내외 관광객으로 인산인해, 사람에 떠밀려 다니는 형국이었다. 다음날은 아내와 둘이 파주 헤이리 문화예술마을을 둘러보았다.


저녁에는 서울 사는 동생 내외의 초대로 그리스 정식도 얻어먹고 맥주도 마셨다. 마지막 날은 난지도 쓰레기장을 매립해 만들었다는 하늘공원을 들렀다가 서울로 이사 간 동료 소설가 댁을 찾아보고는 부산으로 되돌아 왔다.


 풍광 좋은 외국도 아니고 제주도도 아닌, 복작거리는 서울로 놀러가긴 했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여행이었다. 비교적 값싼 고속버스를 타고, 아들의 원룸에서 잤으니 돈이 많이 든 것도 아니다. 청량한 가을햇살 아래 어슬렁거리며 무료로 개방된 고궁을 돌아다닌 것도 나쁘지 않았고 아내와 손잡고 헤이리 문화마을의 북 카페와 공방을 기웃거리며 보낸 시간도 괜찮았다. 늙어갈수록 마누라가 제일 친한 친구가 된다더니 맞는 말인 모양이다.


그런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새삼 느낀 것은 서울과 부산의 문화 인프라의 차이였다. 부산에 고궁 같은 역사문화 유산이 드문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인사동이나 경리단길 같은 구경거리가 없는 건 좀 아쉽다. 뿐인가. 헤이리 문화마을이나 하늘공원처럼 주말에 가볍게 나들이할 만한 곳은 태부족이다. 하다못해 아들의 원룸 근처만 해도 폐쇄된 기찻길을 이용한, 세련되고 깔끔한 동네 공원이 만들어져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다들 서울서 살겠다고 기를 쓰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명색 제2의 도시라는 부산과 서울의 문화 격차를 다시 체감한 것은 좀 씁쓸했다. 부산도 온천천 가꾸기에 나섰고, 시민공원 같은 산책과 휴식공간을 만들기도 했지만, 풍광과 인문적 특성을 살린 소지역 문화시설이 더 확충돼야 할 것 같다. 재정 문제로 고충은 있겠지만 행정관청도 빈 땅이 생기면 아파트업자에게 팔려고만 하지 말고 시민에게 되돌려주려고 노력하면 좋지 않을까.

강동수 소설가·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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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326 ㅣ 2017.09.29

지난달 말 아내와 함께 일본 여행을 잠시 다녀왔다. 버스와 전철을 타고 오사카, 나라, 교토, 고베 등지를 34일 동안 하루에 한 도시씩 주파했다. 그리고 저녁 늦게 항공편으로 오사카에서 후쿠오카로 옮겼다. 일본인 친구가 초대했기 때문.


올해 예순아홉 살인 그이는 내게는 큰누나 같은 할머니다. 몇 년 전 페이스북에서 그이가 친구 신청을 해왔기에 무심코 확인을 누른 게 만남의 시작이었다.


한국을 마흔 번 넘게 방문한 친한파인 그이는 부산에 지인도 많아서 일 년에 서너 차례는 꼭 찾아온다. 그때마다 나는 식사를 대접했던 터다. 지난봄엔 롯데자이언츠 야구를 보고 싶대서 사직운동장에 모시고 간 적도 있다.


연전엔 글 쓰는 후배 둘까지 데리고 후쿠오카에서 차로 두어 시간 쯤 떨어진 그이의 댁에서 이박삼일이나 폐를 끼친 적도 있다. 생선회와 커다란 도미구이를 주 요리로 한 저녁상이 떡 벌어졌었다. 일본술과 맥주, 와인을 섞어 거하게(?) 마시고 떠들고 놀다가 밤 열두 시가 넘어 그이가 깔아놓은 푹신한 침구에서 편안하게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그이가 렌트한 자동차로 세 시간 가까이 걸리는 유후인이란 온천마을을 다녀왔다. 그때의 일은 지금도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거니와 물론 나도 답례로 그이를 우리 집에 하룻밤 유숙케 하고 내 차로 공주와 부여 관광을 시켜드렸던 터다.


이번엔 빡빡한 일정 탓에 그이의 댁에서 묵지는 못했지만, 아침 일찍 우리가 머문 호텔로 찾아온 그이와 함께 한나절 후쿠오카 시내 관광을 했다. 보슬비가 내리는 오호리 공원의 카페에서 빗방울 떨어지는 호수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스시전문점에서 맛난 점심도 대접받았다. 나도 간단한 선물을 준비해 갔지만, 일본 술과 과자를 한 아름 선물 받았다. 집에 와서 꾸러미를 풀어보니 유카타와 일본 나막신이 들어 있어서 아내와 마주보며 웃었다. 글쎄, 그걸 입고 거리를 활보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 성의는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아차차, 놀러갔다 온 자랑이 너무 늘어졌다. 정작 하려는 말은 이렇게 따뜻한 만남이 우리 삶의 갈피마다 끼어 있을 거란 거다. 페이스북으로 우연히 시작된 일본 친구와의 인연은 생각할수록 묘하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한일관계가 늘 좋은 건 아니다. 잊을 만하면 그쪽 정치인들이 일본 식민지배 시절을 미화하는 망언을 내놓아 우리의 속을 긁어 놓기도 한다.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정부 차원의 사과를 아직도 외면하고 있기도 하다.


부산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스친 상념 한 토막. 개인으로서의 일본인은 그 할머니처럼 친절하고 정이 넘치는 사람이 많은데 일본 정부는 왜 군국주의를 버리지 못해 안달일까. 극일을 넘어 진정한 교린(交隣)에 이르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양심과 양식을 갖춘 일본의 민간 인사들과의 연대가 한일 관계의 토대가 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어쨌거나, 이번에 신세를 졌으니 그이가 부산에 오면 부산항 일주 유람선을 태워드릴 생각이다.

강동수 소설가·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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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71 ㅣ 2017.08.28

내 어릴 적 달걀은 꽤 귀한 식재료였다. 먹을 만 한 게 귀했던 60년대 중반 시골학교 사택 마당에다 어머니는 닭을 몇 마리 풀어 키우셨다. 식구들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을 때 아버지의 밥그릇에만 날달걀이 파묻혀 있었다.


아버지가 쓱쓱 비벼 드실 때 침을 꼴깍 넘기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아버지는 나를 물끄러미 보시다가 반나마 남은 달걀밥을 내게 밀어주셨는데 짭짤 고소하던 그 맛의 추억이 오십 년이 더 지난 지금도 혀끝에 감돈다. 그때는 AI가 닭을 습격하지도, 닭이 살충제가 섞인 달걀을 낳지도 않았다.

 
 달걀에 살충제 성분이 검출됐다고 온 나라가 시끄럽다. 물론, 닭에 기생하는 진드기 따위를 없애느라 살충제를 쓴 양계업자도 비양심적이고, 그걸 막지 못한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 그런데 좀 거친 표현이긴 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미필적 고의에 의한 공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달걀을 싸게, 마음껏 먹으려면 그만큼 대량생산 돼야 한다. 그러려면 밀집사육을 해야 한다. 좁은 양계장에 한 마리당 A4 용지 한 장 꼴의 너비로 가둬 수만 마리를 키운다. 달걀 많이 낳으라고 하루 종일 백열등을 켜 둔다. 그러니 어찌 닭이 병이 나지 않고 진드기가 꾀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 닭이 어떤 환경에서 사육되는지 잘 안다.


그럼에도 싼값에 많은 달걀을 먹으려고 평소엔 그 사실에 애써 눈을 감는다. 그래놓고선 이런 사태가 터지면 다들 피해자인양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다가 좀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또 사먹겠지.


싸고 많고 깨끗한 달걀은 형용 모순이다. 세상에 싸고도 안전한 식품이란 없다. 깨끗한 식품을 먹으려면 제값을 줘야 한다. 어디 계란만 그렇겠나. 돼지고기, 쇠고기를 싸게, 실컷 먹으려면 공장제적 생산방식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전에 터진 광우병 파동도 따지고 보면, 고기를 싸게 많이 먹으려는 인간의 탐욕이 불러일으킨 참사가 아닌가. AI에 감염된 닭과 구제역에 걸린 돼지를 수만 마리씩 살처분이란 야만적인 이름 아래 한 구덩이에 파묻은 죄, 생명을 그토록 함부로 다룬 죄는 또 어찌해야 하나.


깨끗한 달걀을 요구하려면, 한 개 천원쯤에 사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대신 적게 먹어야겠지. 마요네즈도, 빵도 적게 먹어야겠지. 우리는 고기도 너무 많이 먹는다. 다들 식탐에 걸린 것처럼. 그래놓고선 돈 들여 찌운 살을 돈 들여 뺀다고 또 야단이다. 현대인들은 성인병에 걸릴 만큼 영양 과잉이 아닌가.


 깨끗한 계란을, 고기를 먹고 싶다면 탐욕을 줄여야 한다. 먹을거리를 우리 생명을 떠받치려고 자연에서 빌린 빚으로 생각하지 않는 한, 우리를 위해 제 몸을 보시한 동물과 식물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 한 살충제 달걀과 같은 사태는 계속 일어날 거다. 다시 말하지만, 이번 사태로 따지자면 우리 모두가 공범이다.

강동수 소설가·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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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85 ㅣ 2017.07.28

얼마 전 중국의 인권운동가 류 샤오보(劉曉波)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전 세계에서 애도의 물결이 넘쳤다. 인권 보장과 일당독재 폐지를 요구해 온 그가 오랫동안 수감 생활을 해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의 죽음에 대처한 중국 당국의 비인도적 방식은 혀를 차게 만들었다.


 간암 말기의 진단을 받았는데도 서방에서 치료를 받게 해 달라는 마지막 간청을 뿌리치고 죽음에 이르게 한 데다 유해를 화장해 바다에 뿌린 일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의 아내이자 인권운동의 동반자인 아내 류샤 역시 가택연금 상태라지 않은가. 머리를 박박 깎은 류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우는 장면은 많은 이의 가슴을 아리게 했던 터다.


류 샤오보는 1989년 중국 천안문 민주화운동의 주역 중 한 사람이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행되자 중국의 학생들과 청년지식인들이 보편적 민주화를 요구하며 천안문 광장에 모여 집회와 시위를 벌인 것이 천안문 민주화운동의 시발이다. 공산당 일당독재체제가 무너질 것을 우려한 당국이 전차와 장갑차를 끌고나와 시위 군중을 밀어버린 것이 이른바 천안문 사태였지 않은가.


당시 올챙이 기자였던 나는 신문사에서 텔레타이프로 쏟아져 들어오는 뉴스를 접하고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쏟아지는 뉴스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대명천지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한숨 쉬었던 기억도 난다. 어쩌면 그때, 불과 그 9년 전 우리가 겪은 광주의 아픔이 내 머리 속에서 오버랩 됐는지도 모른다.


미국 하와이 대학에서 객원연구원으로 머무르고 있던 류 샤오보는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광장에서 지식인을 대표해 단식투쟁을 벌였다. 천안문 시위가 유혈 진압되고 그는 투옥됐지만 굴하지 않았다. 2008년에는 중국 민주화를 요구하는 08헌장을 발표했다가 국가전복 선동혐의로 11년형을 선고받았다. 2010년 그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지만 당국의 출국 불허로 시상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노벨상위원회는 상징적으로 빈 의자에 메달을 올려놓았다.


중국은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하는 이른바 G2국가가 됐다. 하지만, 류 샤오보 같은 인권운동가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한 중국은 패권국가일지는 몰라도 문명국가라고 할 수는 없다. 국격은 GDP의 규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권과 민주적 시스템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도 역사적 굴곡을 겪어온 나라다. 지난 시절 독재정권이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했고,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탄압해 오지 않았던가. 그래도, 우리는 오늘 세계에 자랑할 만한 민주국가를 만들어냈다.


지난해 광장을 메웠던 시민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질서 있게, 그리고 명예롭게 민주공화정의 가치를 복원해 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피와 땀, 그리고 광장의 힘으로 지켜낸 우리의 민주주의가 다시는 훼손되지 않도록 국민 모두가 정신 바짝 차릴 일이다. 복날 무더위 속에서 들려온 류 샤오보의 타계 소식에 문득 든 단상 한 토막.

강동수 소설가·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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