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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6 ㅣ 2020.06.26


청마와 소운 인간미 합작품   

장산은 해운대구에 있다. 그래서 해운대 장산이다. 하지만 동래시장에서 보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건물이나 아파트가 가로막지 않았다면 장산 자락은 충렬사쯤까지 이어지지 싶다. 동래 장산이라고 해도 그러려니 하겠다. 해운대가 동래구 소속이던 시절도 있었으니 동래 장산이 그리 어긋난 표현은 아니다. 말을 그렇게 하지 않을 따름이다.


동래고 교가는 호방하다. 동래 장산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장산 기름진 벌 끝에 동래고가 있다고 스스럼없이 밝힌다. 작사자는 청마 유치환 시인. 동래고 출신이라서 동래와 동래고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교가에는 청마의 남다른 애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한국 대표시인 청마와 동래고, 그리고 동래고 교가는 한 몸이다. 

우람히 굽이쳐 온 아세아의 거창한 얼이/여기 장산 기름진 벌 끝 그 염원을 이루었나니/갸륵할 손 어진 겨레의 슬기 받아 일어선 자 동고는/정의와 인도의 횃불 우렁차게 솟쳐 울렸네./망월대 위에 걸린 하늘 휘영청 푸르고/사나이의 벅찬 뜻은 멀고도 높거니/동고 동고 거룩하다 그 이름/동고 동고 빛내리라 영원히! - 동래고 교가 1절

교가에 나오는 지명은 둘. 장산과 망월대다. 동래구청 홈페이지는 동래고 뒤편 망월산에 있던 망대를 망월대라고 소개한다. 외적이 침입하는가를 망보던 요지다. 망월은 동래고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졸업생이 꾸린 장학회며 산악회 명칭이 망월이다. 동래고 기숙사 또한 그렇다. 동래고 출신은 길을 가다가 망월 간판이 보이면 눈이 번쩍 뜨이고 누가 망월 그러면 귀가 번쩍 뜨인다.
교가에는 정의와 인도의 횃불이 등장한다. 동래고 정신을 함축한 용어다. 설명하기에 앞서 이참에 한마디 하자면 한국의 초중고 교가는 대부분 벼락치기다. 학교 정통성, 학생 동일체를 내걸고 1950년 전후 한꺼번에 만들어졌다. 정부 지침에 따른 것이었겠지만 유명 시인과 유명 작곡가 몇 명이 전국의 교가를 초고속으로 지었다. 번개에 콩 볶아먹듯 가사를 쓰고 곡을 썼다. 
그러기에 교가는 천편일률이었다. 지도를 펴놓고 쓴 것처럼 거의 모든 가사에 지역을 대표하는 유명 산이 나오고 인접한 바다가 나왔다. 학교의 특성이나 발자취는 아예 안중에 없었다. 오로지 어서 빨리였다. 곡도 마찬가지였다. 부르기 쉬워야 하고 힘이 들어가야 해서 행진곡풍이 주류였다. 심하게 깎아내리자면 중국집 단체주문 우짜 우짜 우짜짜였다. 학교 교가에 대한 근본적인 점검과 각성이 필요하다.
동래고 교가 정의와 인도의 횃불은 그런 면에서 반갑다. 동래고 역사를 모르고선 쓸 수 없는 까닭이다. 1898년 9월 개교한 동래고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과 항일학생운동 활화산이었다. 1919년 동래장터 3·1운동 만세 선창자가 동래고 재학생이었으며 1940년 11월 소위 노다이사건으로 촉발된 부산항일학생의거 선봉자가 동래고 재학생이었다.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1995년 동래고 교정에 세운 항일운동기념탑은 동래고 정신을 상징한다. 동래고는 일제강점기 10여 차례 뜨겁고 환했던 정의와 인도의 횃불을 들었다.
동래고 교가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 광복 후 우리말 교가 작사자는 수필가 김소운이었다. 1952년 작사했다. 1907년 영도에서 태어났다. 3·1운동 절영도 소년단장 사건으로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다음 해인 1920년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밀항해 갖은 고초를 감내했다. 광복 직전에 귀국해 광복동과 동래 언덕배기 살았다. 동래 일신여학교 뒤편에서 가축을 치며 살던 1952년 동래고 교가를 작사했다. 그러나 그해 아사히신문 인터뷰 내용이 빌미가 돼 반정부분자로 몰렸고 작사자를 교체해야 했다. 이후 청마가 작사한 동래고 교가가 불렸다.
청마와 소운은 한 살 차이였다. 청마가 아래였다. 그러나 문단 나이는 꽤 차이 났다. 청마는 1931년, 소운은 1923년 등단했다. 그런 연유로 청마는 소운을 깍듯하게 대했다. 5·16 이후 소운의 신분이 정상화되자 동래고 교가 가사를 김소운 것으로 바꾸자고 학교에 요청했다. 학교가 거절하면서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 소운은 그게 평생 고마웠다. 김소운 수필 외투가 그렇듯 동래고 교가는 한국 문단 두 거목의 인간미가 120% 담겼다. 
 dgs1116@hanmail.net 동길산 시인이 쓰는 문학과 동래이야기 18 유치환 동래고 교가

청마와 소운 인간미 합작품   

장산은 해운대구에 있다. 그래서 해운대 장산이다. 하지만 동래시장에서 보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건물이나 아파트가 가로막지 않았다면 장산 자락은 충렬사쯤까지 이어지지 싶다. 동래 장산이라고 해도 그러려니 하겠다. 해운대가 동래구 소속이던 시절도 있었으니 동래 장산이 그리 어긋난 표현은 아니다. 말을 그렇게 하지 않을 따름이다.


동래고 교가는 호방하다. 동래 장산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장산 기름진 벌 끝에 동래고가 있다고 스스럼없이 밝힌다. 작사자는 청마 유치환 시인. 동래고 출신이라서 동래와 동래고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교가에는 청마의 남다른 애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한국 대표시인 청마와 동래고, 그리고 동래고 교가는 한 몸이다. 

우람히 굽이쳐 온 아세아의 거창한 얼이/여기 장산 기름진 벌 끝 그 염원을 이루었나니/갸륵할 손 어진 겨레의 슬기 받아 일어선 자 동고는/정의와 인도의 횃불 우렁차게 솟쳐 울렸네./망월대 위에 걸린 하늘 휘영청 푸르고/사나이의 벅찬 뜻은 멀고도 높거니/동고 동고 거룩하다 그 이름/동고 동고 빛내리라 영원히! - 동래고 교가 1절

교가에 나오는 지명은 둘. 장산과 망월대다. 동래구청 홈페이지는 동래고 뒤편 망월산에 있던 망대를 망월대라고 소개한다. 외적이 침입하는가를 망보던 요지다. 망월은 동래고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졸업생이 꾸린 장학회며 산악회 명칭이 망월이다. 동래고 기숙사 또한 그렇다. 동래고 출신은 길을 가다가 망월 간판이 보이면 눈이 번쩍 뜨이고 누가 망월 그러면 귀가 번쩍 뜨인다.
교가에는 정의와 인도의 횃불이 등장한다. 동래고 정신을 함축한 용어다. 설명하기에 앞서 이참에 한마디 하자면 한국의 초중고 교가는 대부분 벼락치기다. 학교 정통성, 학생 동일체를 내걸고 1950년 전후 한꺼번에 만들어졌다. 정부 지침에 따른 것이었겠지만 유명 시인과 유명 작곡가 몇 명이 전국의 교가를 초고속으로 지었다. 번개에 콩 볶아먹듯 가사를 쓰고 곡을 썼다. 
그러기에 교가는 천편일률이었다. 지도를 펴놓고 쓴 것처럼 거의 모든 가사에 지역을 대표하는 유명 산이 나오고 인접한 바다가 나왔다. 학교의 특성이나 발자취는 아예 안중에 없었다. 오로지 어서 빨리였다. 곡도 마찬가지였다. 부르기 쉬워야 하고 힘이 들어가야 해서 행진곡풍이 주류였다. 심하게 깎아내리자면 중국집 단체주문 우짜 우짜 우짜짜였다. 학교 교가에 대한 근본적인 점검과 각성이 필요하다.
동래고 교가 정의와 인도의 횃불은 그런 면에서 반갑다. 동래고 역사를 모르고선 쓸 수 없는 까닭이다. 1898년 9월 개교한 동래고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과 항일학생운동 활화산이었다. 1919년 동래장터 3·1운동 만세 선창자가 동래고 재학생이었으며 1940년 11월 소위 노다이사건으로 촉발된 부산항일학생의거 선봉자가 동래고 재학생이었다.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1995년 동래고 교정에 세운 항일운동기념탑은 동래고 정신을 상징한다. 동래고는 일제강점기 10여 차례 뜨겁고 환했던 정의와 인도의 횃불을 들었다.
동래고 교가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 광복 후 우리말 교가 작사자는 수필가 김소운이었다. 1952년 작사했다. 1907년 영도에서 태어났다. 3·1운동 절영도 소년단장 사건으로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다음 해인 1920년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밀항해 갖은 고초를 감내했다. 광복 직전에 귀국해 광복동과 동래 언덕배기 살았다. 동래 일신여학교 뒤편에서 가축을 치며 살던 1952년 동래고 교가를 작사했다. 그러나 그해 아사히신문 인터뷰 내용이 빌미가 돼 반정부분자로 몰렸고 작사자를 교체해야 했다. 이후 청마가 작사한 동래고 교가가 불렸다.
청마와 소운은 한 살 차이였다. 청마가 아래였다. 그러나 문단 나이는 꽤 차이 났다. 청마는 1931년, 소운은 1923년 등단했다. 그런 연유로 청마는 소운을 깍듯하게 대했다. 5·16 이후 소운의 신분이 정상화되자 동래고 교가 가사를 김소운 것으로 바꾸자고 학교에 요청했다. 학교가 거절하면서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 소운은 그게 평생 고마웠다. 김소운 수필 외투가 그렇듯 동래고 교가는 한국 문단 두 거목의 인간미가 120% 담겼다.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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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59 ㅣ 2020.05.25



오호, 이 여섯 무덤은 … 
  

올해는 음력 4월이 길다. 4월 23일부터 6월 20일까지 두 달이나 된다. 조선시대 음력 4월은 통곡의 달이었다. 특히 동래는 4월 15일을 공식 기일로 정해 매년 이날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낸 곳은 동래경찰서 자리에 있었던 농주산이었다. 거기에 제단을 쌓고 원통하고 절통한 심정으로 제를 올렸다.


첫 제사는 1732년 4월 있었다. 발단은 그 한 해 전 동래읍성을 쌓다가 무더기로 나온 유해였다. 유해는 읍성 남문 좌우에서 나왔다. 형체와 뼈가 온전한 것만 12구였고 조각조각 부서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무덤 하나에 다 모시지 못해 여섯 무덤으로 나눴다. 여섯 무덤은 동래부 남쪽 삼성대 서쪽 산기슭, 요즘으로 치면 도시철도 동래역 부근 내성중학교 주변이었다. 
유해는 모두 1592년 임진년 왜란 순절자였다. 임진년 4월 15일 벌어진 동래읍성 전투에 목숨을 잃은 민관군이었다. 초여름이라서 시신은 이내 부패했다. 왜군은 시신을 읍성 해자에 내던지고 흙으로 덮었다. 그 순절자 유해가 읍성을 쌓는 도중에 만천하 드러났다. 그때가 1731년. 한을 품고 묻힌 지 139년이 지나서였다. 1788년 우물을 파다가 또 유해가 나오면서 여섯 무덤은 일곱 무덤, 칠총(七塚)이 되었다. 
1731년 동래부사는 정언섭이었다. 1730년 8월부터 1733년 1월까지 동래부사를 지냈다. 물론 음력이다. 부산일보에 연재하는 작가와 함께하는 고개와 길-동래 인생문고개에서도 밝혔듯이 정언섭은 글을 잘 썼다. 양정 정묘 비문도 정 부사가 썼다. 순절자 유해를 두고 울컥했을 정 부사는 여섯 무덤 임진전망유해지총 묘비문도 직접 썼다.
비문은 모두 250자. 울컥했던 정 부사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비문을 쓴 지 3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읽어도 그 마음이 울컥 전해진다. 묘비에 새겨진 한 글자 한 글자 당대의 곡소리였고 피눈물이었다. 국보는 나라가 정하는 거지만 부산시 국보 1호로 지정해도 그럴 만하다고 여겨지는 게 정언섭 임진전망유해지총 비문이다.
비문은 오호, 이 여섯 무덤은으로 시작한다. 원문은 오호차육총(嗚呼此六塚)이다. 임진년 왜란 때 겹겹이 포위됐어도 절개를 지켜 돌아가신 이들을 모신 무덤이라고 밝히면서 발굴 당시 정황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화살촉, 부러진 창이 나왔으며 왜적이 쏜 돌과 탄환 사이사이 유해가 있었다.

이(유해)를 거두어 상자에 넣어 동래부 남쪽 삼성대 서쪽 산기슭에 옮겨 묻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바라건대 충신·의사의 장지인 것을 알고 밟지도 말고 훼손시키지도 말아라. 또한 바라건대 해마다 농주산 4월의 제사 때에는 이 무덤에 따로 제사를 지내서 마을의 관습으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 

250자 비문은 당부로 끝난다. 잘 모시고 널리 알리라는 당부다. 그런데 당부가 엄하기는커녕 자상하다. 밟지도 말고 이 한 구절에 정 부사 순정한 마음이 다 담겼다. 아울러 이 한 구절이 전하는 행간의 의미는 비장하다. 핏물이 밸 정도로 입술을 깨문 비분강개가 읽히고 섬나라 왜에 그토록 당해야 했던 철천지한이 읽힌다.
왜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임진년 순절자 무덤도, 농주산 제단도 눈엣가시였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무덤은 망가지고 제단은 헐렸다. 일곱 무덤은 복천동 외딴곳으로 쫓겨나 한 무덤이 되었고 광복 이후 동래 금강공원 동래임진의총 묘역으로 옮겼다. 농주산 제단은 도로를 낸다는 명목으로 산 자체가 아예 없어졌다. 만행도 그런 만행이 없었다.
동래임진의총 묘역은 서늘하다. 높다란 소나무가 늘어뜨린 그늘이 서늘하고 20기나 되는 동래부사 송덕비가 내뿜는 귀기가 서늘하다. 묘역 안쪽 고풍스러운 기와집은 순절자 혼을 모신 충혼각. 충혼각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일곱에서 하나로 합장한 의총이 나오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정언섭 비문이 새겨진 묘비가 나온다. 비문 한자 원문과 한글 해석은 부산시 홈페이지 문화관광-역사-부산향토사도서관-부산금석문에 실렸다.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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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31 ㅣ 2020.04.27


소설로 되살린 동래 큰 연못  

윤후명은 소설가다. 1980년대 대표작가다. 1946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고교와 대학을 서울에서 나왔고 등단 이후 줄곧 서울에서 지냈다. 서울 몇 군데 대학의 강단에 서기도 했다. 그런 그가 동래를 소재로 소설을 썼다. 소설 제목이 특이하다. 동래시집(東萊詩集)이다. 1982년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발표했고 이듬해 김병익 평론가가 펴낸 <83문제작품 20선집>에도 수록됐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부산에서 다녔지요." 서울에서 줄곧 지낸 윤후명은 어떤 인연으로 동래가 나오는 글을 썼을까. 경성대 국문학과 교수를 지낸 조갑상 소설가는 그 궁금증을 단번에 풀어준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조갑상 소설가는 윤후명과 비슷한 연배. 윤 소설가는 군인 부친을 따라서 부산에 왔고 개성중 2학년이던 1960년 봄 4·19를 겪었다. 동래시집은 그때 경험이 작품의 골격이다.
내가 감탕 혹은 뻘 속에서 연뿌리를 베는 광경을 본 것은 부산의 동래에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날 나는 허벅다리까지 오는 긴 장화를 신은 사내들이 물 뺀 연못의 뻘을 뒤집을 때마다 하얗게 드러나는 연뿌리를 매우 신기한 눈초리로 들여다보았다.
소설의 주인공은 소시민이며 시인이다. 지난봄 서울의 길거리 난전에서 보았던 연뿌리를 회상하며 소설은 시작한다. 주인공의 기억은 중학생 시절 겪은 4·19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면 근처에서 데모대를 구경하려고 어슬렁거리다 중학생으로선 납득할 수 없는 경찰의 폭력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급기야 주인공은 데모대에 합류한다. 대열에 휩쓸려 구호를 외쳤고 동래까지 걸어간다. 그 와중에 시위 행렬은 점차 줄어들고 동래에 이르러 남은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주체인가 꼭두각시인가! 그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마주친 게 연뿌리 캐는 장면이다. 혼자가 된 주인공은 연뿌리 캐는 장면을 통해 개인의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자아정체성 접근이랄지 모색은 동래시집은 물론 윤후명 소설에 관통하는 대주제다.
그건 그렇고 작가가 봤던 동래의 연못은 어딜까. 긴 장화를 신은 사내들이 연뿌리를 캘 정도면 대단히 큰 연못일 터. 데모대가 대로를 따라서 행진했다고 보면 연못은 대로변에 있었지 싶은데 2020년 현재 서면에서 동래로 가는 대로변엔 큰 연못은커녕 우물 같은 연못조차 없다. 실제로는 없는, 작가의 상상력은 아닐까. 그렇진 않다. 연못은 실제로 있었다. 
지금은 4월. 60년 전 윤후명이 그랬듯 서면에서 동래까지 걷는다. 경찰서가 있던 서면로터리에서 양정 송상현광장, 거제리 하마정교차로를 거쳐 부산교대로 접어든다. 교대 맞은편은 한양프라자와 한양아파트 단지다. 아, 여기! 프라자와 아파트 단지를 보자 번개처럼 스치는 장면이 있다. 번개처럼 스치는 기억일 수도 있겠다. 아, 여기!
나는 학창시절 통학 거리가 전교 1등이었다. 초중고 다 그랬다. 집은 범어사 아랫마을 팔송. 초등학생일 때는 중구 영주동까지 다녔고 중학생일 때는 서구 송도까지 다녔고 고교생일 때는 대신동까지 다녔다. 버스를 타고 그 먼 거리를 통학하면서 차창으로 봤던 풍경 가운데 하나가 매립되기 이전 한양프라자와 한양아파트 자리였다. 지금도 선연하게 기억할 만큼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장거리 통학하던 때는 1970년대. 그때 저 자리는 연못이었다. 매립하고서 아파트 단지를 세울 만큼 넓고 컸다. 소설가가 봤던 연뿌리 캐는 장면은 못 봤지만 붉거나 희거나 노란 연꽃이 한 뜸 한 뜸 자수 놓은 연못은 그야말로 별유천지비인간이었다. 내 언젠가는 저걸로 시를 쓰리라. 그러다 나도 모르는 사이 연못은 흙으로 메워졌고 시를 쓰리란 다짐은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동래시집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윤후명 소설에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 철저한 개인이었던 만큼 동래시집 역시 작가의 의식이 도드라진다. 소설에 나오는 연뿌리는 그러한 주제의식을 사실적이면서 율동적으로 드러낸 은유다. 연꽃은 꽃 중에서도 철저한 개인 꽃. 얼마나 철저했으면 뿌리를 물속에다 박았을까. 연뿌리가 서서히 꽃대를 밀어 올리는 요즘이다.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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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09 ㅣ 2020.03.25



봉오리 기어이 벙글어 벚꽃 천지 금강공원

고졸 신화를 이따금 접한다. 고등학교 학력으로 대기업 임원이 됐다거나 유학파를 능가하는 스타 셰프가 됐다는 이야기들이다. 우리 사회 학력 장벽이 그만큼 높다는 방증이다. 그러기에 고졸 신화가 던지는 울림은 묵직하다. 고졸 신화가 그럴진대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같은 국졸 신화는 던지는 울림이 상상 이상이다. 접할 때마다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채낙현(1930∼2004) 수필가도 국졸 신화 주인공이다. 국졸 학력으로 중학교 교장 등 12년을 교직에 있었다. 이후 신문사 편집부국장 등을 거쳐 행정사무관 시험에 합격해 23년을 행정 공무원으로 봉직했다. 부산시 중구 총무과장을 시작으로 부산시 문화공보실장, 전북 보건사회국장 등을 지냈다. 경남 거제군수와 전북 옥구군수, 부산에선 여섯 차례 구청장을 지낸 뒤 동래구청장 재직 중 정년퇴임했다.
채낙현 고향은 경남 함안. 어릴 때는 부자였다. 함안에서 가장 번화가인 읍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안 드넓은 들판을 쩡쩡 울릴 만큼 위세가 대단한 벼슬에 있었다. 수리 시설인 보(洑)를 관리하던 보도감(湺都監)이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문제였다. 만고 한량이었다. 친구와 기생에 둘러싸여 술과 노름으로 탕진한 채 딸 넷, 아들 하나를 남기고 요절했다. 논밭이 빚으로 넘어가고 외양간 소마저 내줘야 했다.
어머니는 강했다. 30대 초반에 남편을 여읜 아픔은 잠시였다. 살아야 했다. 남편 친구 주선으로 논 다섯 마지기를 소작하며 모심기, 논매기, 물 대기 같은 갖은 일을 도맡았다. 봄이면 산나물 뜯어 돈을 만들었고 하천공사가 있으면 악착스레 응했다. 밤마다 물레를 돌렸다. 아들 하나 소년 채낙현은 학교가 파하면 지게를 졌고 농사일을 거들었다. 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 친구 소개로 함안경찰서 앞 대동상회에 점원으로 처음 취직했다. 신문 배달, 모교 급사 등을 전전하며 10대 중반이 다 갔다. 
주경야독이었고 고진감래였다. 마침내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땄다. 그때가 열여덟이었다. 모교를 비롯한 고향 교단에 섰고 스물둘에는 중등 교사 자격증을 따 부산 해동중학교로 왔다. 이렇게 해서 교직과 언론계, 행정공무원 등 모두 43년을 공직에 있었다. 국졸 신화 채낙현의 한평생은 모진 고난에도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며 성취했던 인간 승리의 한평생이었다.
동래구청장은 채낙현 수필가의 마지막 공직이었다. 해운대구청장으로 있다가 1989년 6월 부임해 1991년 3월까지 재임했다. 동래구청장으로 발령 나자 채낙현은 대단히 기뻐했다. 조선시대로 치면 정3품 당상관 동래부사 자리였다. 일도 많이 했다. 동래의 노래와 구민의 날, 애향대상 등을 제정했다. 화목주택 김용완 사장에게 문화회관 건립기금 5억 원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금강공원의 벚꽃을 감상하려고 일찍 집을 나섰다. 따뜻한 날씨가 며칠 동안 이어지더니 그사이 나뭇가지마다 총총히 맺었던 벚꽃 봉오리가 기어이 벙글어 여기에도 천지가 화사한 벚꽃으로 치장하여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다.
 - 채낙현 수필 꽃눈이 내린다 중에서

채낙현은 등단 과정을 별도로 밟지 않았다. 그렇긴 해도 문단에선 누구도 토 달지 않았다. 글이 워낙에 주옥이었다. 등단 내력을 따지는 문단 풍토에서 오로지 글의 힘으로 동래문화회  회장, 부산외솔회 회장, 부산문인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수필은 꾸준히 발표했다. 모두 네 권의 수필집을 냈다. 어릴 적 산전수전이며 어머니 곡진한 삶을 토로한 수필은 한 글자 한 글자 독자의 마음을 콕콕 찌른다.
꽃눈이 내린다는 세 번째 수필집 <고향에는 봄이 있다>에 실렸다. 퇴임 이후 곧잘 찾았던 금강공원 벚꽃이 소재다. 거제동 경남아파트 자택에서 가까워 금강공원을 자주 찾았다. 금정산으로 가는 케이블카에선 흥겨웠던지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콧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나온다.
내가 아는 채낙현도 그랬다. 엄한 것 같아도 흥이 넘쳤다. 1995년 불교TV방송(BTN) 부산지사에서 나는 기획·홍보 부서장이었고 그는 고문이었다. 그때 접한 수필가 채낙현은 인간미가 넘쳤다. 덕이 넘쳐 덕담을 자주 했다. 심성이 원래 그랬다. 순하고 선했다. 벚꽃 봉오리가 기어이 벙글어 금강공원은 곧 벚꽃 천지겠다. 벚꽃 한 잎 한 잎, 채낙현 수필 한 구절 한 구절, 올봄 금강공원은 그렇게 걸어봐야겠다.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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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45 ㅣ 2020.02.26


왜의 극성 물리친 평화로운 세상 담아   


동래유치원은 각별하다. 남다른 데가 한둘 아니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동래부인회가 지역 유아를 가르치려고 세웠으며 지금은 동래의 어른이 주축인 동래기영회에서 운영한다. 동래구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100년 훨씬 넘는 푸조나무는 유치원의 고풍스런 역사를 말한다. 동래부사 정현덕(1810∼1883)의 태평원 시비 역시 동래유치원을 각별하게 한다. 유치원과 맞닿은 동래시장까지 고풍스럽게 한다.


정현덕은 풍운아였다. 호방한 시인이었으며 최장수 동래부사였다. 그러나 생애는 굴곡의 연속이었으며 유배지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는 고종 아버지 흥선대원군 복심이었다. 생애는 대원군의 영욕과 궤를 같이했다. 대원군이 흥하면 흥했고 대원군이 망하면 망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재집권한 대원군이 명성황후에게 밀려나자 차관 자리에서 쫓겨나 유배됐고 거기서 생애를 마쳤다.
동래부사 임기는 통상 900일이었다. 그러나 임기를 채운 부사는 거의 없었다. 이백오십 몇 명 되는 동래부사 중에서 열 명 조금 넘는 이가 임기를 채웠고 대개는 1년 정도만 봉직했다. 한 해조차 채우지 못한 부사도 오십 명이 넘었다. 임기를 채우지 못한 이유는 동래가 험지였기 때문이다. 왜와 접한 국경이라 좌불안석이었고 상감 계신 서울에서 멀리 동떨어진 변경이라 소외감을 느꼈다. 자신의 병이나 노부모 공양을 둘러대고 물러나곤 했다.
정현덕은 달랐다. 900일의 무려 세 배를 동래부사로 지냈다. 1867년 6월부터 1874년 1월까지 6년 7개월을 국경이자 변방인 동래를 지켰다. 그렇게 오래토록 동래를 지켰던 건 대원군 엄명을 받든 까닭이다. 동래부사는 목민관의 기본책무인 수령칠사 외에도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으니 섬나라 일본과 관계 정립이었다. 왜의 근황에 촉각을 세웠고 왜관 통제에 진력했다. 
대원군 엄명은 줏대였고 자주였다. 풍전등화의 그 시절, 힘 좀 있다고 불법과 무리수를 남발하는 왜에 대한 강경한 대응이었고 강력한 응징이었다. 정 부사는 초량왜관을 자기들 땅으로 만들려는 왜의 야욕에 맞섰으며 일본 군함이 부산 앞바다에서 시위해도 굴하지 않았다. 동래부 전령서란 격문을 왜관 벽에 붙여 그들의 극악무도를 꾸짖었다. 밀수 같은 암거래도 엄중 단속했다. 왜와 암거래한 이를 참형에 처해 서릿발 기강을 세운 이가 정현덕이었다.
정현덕은 호방했다. 그러기에 겁박과 꼼수를 일삼던 왜에 당당할 수 있었다. 호방했던 풍모는 그가 남긴 시에서도 엿보인다. 동래부사 3년이 지나던 1869년 쓴 봉래별곡이 그렇고 동래 금강공원 가장 안쪽에 있는 동래금강원 시비가 그렇고 동래유치원 태평원 시비가 그렇다. 임오군란 여파로 유배당하지 않았다면, 유배지에서 죽지 않았다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시인이 되고도 남았을 정현덕! 그와 함께한 6여 년, 동래는 당당했고 시심이 넘쳤다.

태평교 다리 아래 태평원에는/정원의 풀과 꽃이 날로 무성해지네./돌에는 큰 글자 셋 새로이 새기었고/길가에선 지방 얘기 많이 듣는다네.(…) 태평원 안의 만년대에는/도호부사가 외영(外營)을 물가에 열었네./경치 좋은 곳에 아지랑이와 안개 쉽게 거느리고/언덕 둘러 꽃나무도 손수 새로 심었네.(…)/만년대 아래 만년교에는/물에 걸린 긴 무지개 그림자 흔들리니/방초 핀 맑은 시내에서 술잔 씻는 것 바라보고/녹음 진 밝은 달 아래 퉁소를 불게 하네.(…)

"여기가 상춘정이란 정자 터라고 들었어요. 쉬면서 풍류를 즐겼다고 해요." 동래유치원 하은아 원장은 내심 뿌듯하다. 태평원 시비가 원내에 있어서 자랑스럽단 표정이다. 유치원을 운영하는 동래기영회 어른들에게 들었다며 한 마디 한 마디 내놓은 이야기에도 뿌듯함이 뚝뚝 묻어난다. 태평원 시비는 동래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다. 건물이나 아파트가 가리지 않았다면 탁 트여 시원시원할 풍광이다. 하 원장 말대로 풍류를 즐기기엔 그저 그만인 명당이다. 학소대가 있던 법륜사 바로 아래다.
시에서 언급한 큰 글자 셋은 태평원(太平園). 왜의 극성을 물리친 평화로운 세상을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화강암에 새긴 세 글자는 굵직하고 깊숙하다. 한 글자 한 글자 손가락 넣어 더듬어 본다. 시를 쓴 정현덕 부사의 숨결이 읽히고 글자를 새긴 장인의 손길이 읽힌다. 시는 태평원 세 글자 위에 잔글씨로 새겨 두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쓰다듬는다. 시비를 세운 비슷한 시기에 심었다는 보호수 푸조나무는 그런 내가 장한지 나를 쓰다듬듯 가지를 구부린다.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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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37 ㅣ 2020.02.26


구한말∼현재 동래 관련 자료
사진·문서·시청각·박물 등
3월 1일∼5월 15일 신청 받아
기증자에겐 포상 등 예우키로
2022년 신청사 건립 때 전시

부산의 혼과 정체성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고읍도시인 동래구는 역사와 문화예술의 본고장으로서 맥을 계승하고자 동래의 혼이 담긴 민간 기록물 수집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동래구는 오는 2022년 완공 예정인 신청사 건립을 계기로 동래의 새로운 문화 르네상스를 창출하기 위해 다음달부터 3개월간 민간이 소장하고 있는 다양한 기록물을 수집해 전시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친다.
수집 대상은 구한말(舊韓末) 개항부터 현재까지 격동기를 거치면서 동래의 생활변화를 알 수 있는 역사·문화·예술·인물·음식·관혼상제 등 동래와 관련된 보존가치가 있는 모든 기록물이다.
수집 유형은 △구민이 소장하고 있는 옛 동래 거리, 건물, 온천천 등의 모습이 담긴 사진·영상·포스터·전단지 등 동래의 마을 역사를 간직한 기록물 △공무원증·발령장·위촉장 등 각종 증서, 행정기관 발행 공문서, 월급봉투, 수첩 등 공무관련 개인소장 기록물 △기관 현판, 깃발, 통신·전자기기, 다이얼식 전화기, 등사기 등 행정업무 사무용품 △동래 관내 초·중·고등학교 학생증, 개인소장 훈장 △그 외 동래의 모습을 기억으로 재현할 수 있는 역사 기록물로서 문서·시청각·박물(博物) 형태면 된다.
수집 기간은 3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이며, 우편·방문·이메일(kirok@korea.kr) 등으로 동래구 민원여권과로 신청하면 된다. 우편은 (47885)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천로359번길 70(낙민동) 동래구 민원여권과 기록물계(1층)로 보내면 된다.
한편 기록물 기증자에게는 구청장상이 주어지며 기록물은 동래구 기록관에 전시 및 영구 보존된다. 특히 국가적으로 보존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기록물일 경우 국가기록원과 연계해 국가기록물 지정 및 기증자 포상을 추진할 계획이다. 자세한 내용은 동래구 홈페이지 참조
 민원여권과(550-4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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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36 ㅣ 2020.02.26


캡슐로 나와의 약속 지키기
동신중학교(교장 강미라)는 3월 2일을 기점으로 개학식과 입학식을 본교 해랑관에서 열 예정이다. 초등학교 6학년은 중학교라는 새로운 곳을 접하게 되며 1학년은 2학년으로, 2학년이던 학생들은 중학교 3학년으로 진학해 고등학교를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해랑관에서는 선생님들이 새로 1학년생으로 입학하는 새내기들을 위해 작은 행사와 밴드부가 준비한 여러 노래와 퍼포먼스를 보여줄 예정이다. 그리고 자신의 장래희망과 포부를 쪽지에 적은 후 캡슐에 넣어 졸업할 때 그 캡슐을 줄 예정이다. 중학교로 새로 올라오는 학생들과 후배, 내 친구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잘 적응했으면 좋겠고 더불어 새로운 환경에서 잘 적응하리라 기대된다.
 박영준(동신중 리포터)
졸업식! 또 다른 시작을 향해
남일중학교(교장 김경선)는 2월 7일 2019년도 졸업식을 시행했다. 개근상 공로상 최우수상 등 다양한 상을 시상하고,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이어진 이번 졸업식은 코로나19 여파로 각 교실에서 진행됐다. 아쉽게도 부모님들의 참석이 불가피하여 졸업식을 끝내고 나오는 3학년들을 기다리고 부모님들로 학교운동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제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하게 될 졸업생들의 건투를 빈다.
  김민경(남일중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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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6 ㅣ 2020.02.26


탄생 110주년 기념사업
뮤지컬 제작, 평전 발간

부산이 낳은 독립운동가이자 음악가, 문화운동가인 먼구름 한형석(1910∼1996) 선생 탄생 110주년을 맞아 그의 일대기를 담은 뮤지컬이 제작된다. 이와 함께 한형석 선생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국제 심포지엄과 평전도 발간된다. 또 한형석 선생이 독립운동을 펼친 중국 시안, 상하이를 중심으로 부산과 중국 예술가들의 국제교류사업도 펼쳐질 예정이다.    
부산문화재단은 부산의 정신, 부산의 삶, 예술로 기억하다를 주제로 △국제교류 사업 △학술·발간 사업 △공연예술 콘텐츠 제작 등 먼구름 한형석 탄생 110주년 기념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치기로 했다.
강동수 부산문화재단 대표이사는 "동래 출신 먼구름 한형석 선생은 광복군에서 활동한 항일 독립운동가일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음악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으며 해방 후 부산 문화예술 발전의 주춧돌을 놓은 분인데도 그동안 지역사회에서 그를 기리려는 노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며 "그분의 삶과 업적을 기림으로써 부산의 현대사를 떠받치는 사표(師表)로 삼는 한편 나아가 진정한 부산정신의 재발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부산문화재단(745-7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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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2 ㅣ 2020.02.26


△ 봄을 부르는 오카리나와 팬플룻의 소리=3월 6일
△ Red Song X moon phase 콘서트=3월 13일
△ 지림씨의 재즈로망스 5번째 T-Band Blue 편=3월 20일
△ 퓨전국악밴드 " 달빔" 콘서트=3월 27일
음악회 공연은 금요일 오후 8시. 차 포함 입장료 1만원
 스페이스 움(557-3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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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42 ㅣ 2020.01.29


동래 곳곳 처음 알린 연작시 

동래구의 꽃, 구화는 매화다. 왜 매화일까. 질문을 받으면 열에 아홉은 얼버무리기 예사다. 그 해답은 옛날 시에 나온다. 정포(1309~1345)는 고려 문인. 그가 쓴 동래잡시(東萊雜詩)는 동래가 나오는 한국 최초의 연작시다. 거기에 매화가 등장한다. 그러므로 동래구 구화는 그냥 정해진 게 아니라 천년의 역사와 문학적 향내가 담긴 그윽한 선정이다.

정포는 선이 굵었다. 그러면서 섬세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강직한 공직자이면서 그가 쓴 시는 한 올 한 올 보드라운 순면이었다. 고려 도읍지 개성에서 근무하던 공직자가 동래 시를 쓸 수 있었던 건 유배 때문이었다. 입바른 상소로 파면된 터에 모함까지 받아 유배형을 받았다. 유배지가 동래 인근 울산이었다. 굵고 섬세한 성정은 유배지 고통을 풍류로 달래었고 동래잡시가 세상에 나왔다.
동래잡시는 문학사적 의미가 대단하다. 문학작품 가운데 동래를 소재로 한 최초의 연작시다. 동래가 받들고 모셔야 할 시다. 묘사가 섬세해 고려 후기 동래의 풍광을 상상하는 즐거움이 크다. 동래 관아, 동래 온천, 소하정, 적취헌을 비롯해 해운대, 화도(花島)의 풍경이 그림처럼 이어진다. 서른일곱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공직자였지만 동래잡시는 매향 휘날리며 천년 세월을 이어 간다.

관아는 매화 언덕에 의지해 있고/민가는 물가에 연하여 있네 / 순풍이 아직도 훨훨 넘치고 / 산 것은 모두 빛나고 또 빛나네 / 손님을 보려고 술 들고 오는데 / 선비라곤 모두 시를 즐기네 / 이 풍경을 내사 사랑하노니 / 사람에게 쉽사리 세인에게 알리지 마소.
 - 번역과 출처 : 부산역사문화대전
동래는 동쪽의 봉래산(蓬萊山). 신선이 사는 선경이었다. 시인 묵객이 즐겨 찾았다. 뜨거운 약수 펄펄 솟는 온천은 동래가 가진 또 다른 매력이었다. 정포 역시 동래잡시에서 2년 동안 토질로 고생하다가 반나절 목욕으로 속진을 다 씻었다고 노래한다. 마흔 되기 전에 세상을 버린 정포. 그리 건강 체질은 아니었을 그에게 누군가 온천을 권했을 테고 오며 가며 동래의 풍광은 그에게 붓을 들게 했으리라.
 인용한 시는 동래읍성 풍광을 노래한다. 압권은 첫 행에 나오는 매화 언덕(梅塢, 매오)이다. 오(塢)는 언덕, 둑, 성채, 마을 등을 뜻한다.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읍성이나 읍내 마을을 연상하면 된다. 하천 범람을 막으려고 쌓은 둑일 수도 있겠다. 둑이라면 고려시대 이미 온천천에 홍수 방지시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니 참 대단한 시다. 매화는 맑고 올곧은 선비의 기상을 상징. 관아의 중심지 동래가 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향긋한 고장이었음을 이 한 구절로 알 수 있다.
2행은 하천 풍광을 노래한다. 온천천과 수영강 주변 풍광이겠다. 물가에 옹기종기 이어지는 초가삼간은 상상만으로도 진경산수화다. 밥 지으면서 나는 연기가 봄바람 훈풍에 아스라이 날리는 초저녁을 상상해도 되겠다. 저 멀리 금정산 능선 너머로 해는 지고 보이는 것은 죄다 노을에 물들어 불그스레 빛나는 저녁나절. 펄쩍펄쩍 뛰는 잉어인들 빛나지 않을까.
마지막 구절은 역설이다. 소문이 나면 사람이 몰려올 테고 그러면 환경이 훼손될 수도 있으니 소문내지 말란 얘기는 역으로 동래의 빛나는 풍광을 제발 좀 많이 알아달란 당부다. 빛나는 것은 원래 그렇다. 혼자 알고 싶으면서도 널리 알리고 싶은 것! 동래는 정포가 시를 쓸 무렵인 7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혼자 알고 싶으면서도 널리 알리고 싶은 고장, 거기가 동래다.
동래잡시가 실린 문헌은 <동문선>이다. 조선 후기인 1713년 편찬한 책으로 삼국시대 이후부터 당대까지 시와 산문을 실었다. 동래잡시 다른 시에 나오는 화도(花島)는 말만 들어도 울긋불긋해진다. 나비가 떼를 지어 날고, 작은 못에는 물고기가 뛰어논다는 구절은 거기가 어딘지 궁금증을 더한다. 동래 곳곳을 다니며 부산을 처음으로 알린 동래잡시는 동래를 대표하고 부산을 대표하는 연작시. 700년 푸른 이끼를 머금고 빛난다.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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